패러렐 (2008/05/14~2010/6/26)
(1)
1.
사진 속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며, 세상의 모든 신부가 그러하듯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는 이 미소를 본 것이 언제였는지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는 가물거리는 기억을 지워 버리듯 두 눈을 꼭 감았다. 결혼 앨범을 정리하고 눈앞에 덩그러니 놓인 보잘 것 없는 서류봉투를 뜯었다. 미리 준비 해 두었던 도장을 꺼내들고 그것을 꾹 눌러 찍는다.
사카에구치 유우토
아사기리 쿄우코
3년하고 1개월의, 짧고 쓸쓸했던 결혼 생활이 단 한 장의 종이로 싱거울 정도로 허무한 끝을 맺는다.
"현재 비어 있는 방은 이것과, 이것이 있는데..."
부동산 직원의 불친절한 태도를 눌러 참으며 맞은편에 앉아 그가 보여주는 몇 장의 사진을 살펴보았다. 어느 집이든 딱히 눈에들어오는 곳은 없었지만, 그다지 까다롭게 집을 찾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몸뚱어리 하나, 편히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방 하나면 솔직히 어디든 상관이 없었다. 직원이 내어 준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추었다는 맨션의 사진을 살펴보다가, 슈퍼에서 가깝다는 집을 대충 손으로 찍었다. 직접 방문해서 살펴보겠냐는 말을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계약을 끝냈다. 빠른 시일 내로 입주 할 수 있도록 준비해보겠다는 말을 들으며 부동산을 나왔다. 갑갑한 마음에 길 위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햇살이 눈동자를 찔러왔다. 찔끔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삿짐을 하나하나 직접 내 손으로 고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들고 갈 짐이 적었기에 그 점에서 잠깐 놀란다. 결혼 앨범은 이미 쓰레기통에 박혀 있었고, 간단하게 옷과 필요한 책만을 챙겼다.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대부분의 물건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오늘부터 사이타마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가족들과 며칠 함께 보내기로 했다. 지금까지 이혼 준비로 받은 스트레스가 적지 않게 작용했던지, 위궤양으로 휴가까지 받은 참이었다. 가족들 얼굴을 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내가 있어도 되는 장소에서, 편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사이타마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그것들을 무심히 보다가, 지쳤다는 것을 실감했다.
"유우토~!!!! 정말이지 너란 애는!!"
현관을 열자마자 여전히 고음을 자랑하는 누나의 목소리가 호들갑스럽게 나를 맞았다.
"...오랜만이네."
생각만큼 밝게 나와 주지 않는 조그만 목소리로 잔뜩 움츠러들 듯 인사를 하고 말았다.
'이혼남'
그것은 이미 하나의 낙인과도 같았다. 이 좁은 동네에서 소문이 가지는 이미지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아버지, 누나, 동생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실망을 가득 안은 시선이 무서웠다. 옛날부터 그랬다. 잔뜩 기대 당하고, 그것을 제대로 이루어주지 못했을 때의, 상대방에게서 돌아오는 빛을 잃은 눈동자가, 가장 두려웠다.
"어째서 그동안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거야! 자주 좀 오면 좋았을걸..."
"그러게, 미안해 누나. 좀 바빴어..."
"너를 집에서 보는 게 도대체 얼마만이니..."
"하핫..."
“웃을 일이야? 넌 우리가 교토까지 만나러 가지 않으면 얼굴도 안 볼 생각이었지?”
“에이, 누나. 섭섭하게 무슨 그런 말을 해...”
"..... 피곤하지?"
"....응. 매형은?"
"지금 출장 중."
"으응... 그렇구나..."
지금은 남동생이 쓰고 있는 내 방에서, 아직도 같은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는 침대를 향해 다이빙하듯 쓰러졌다.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벽지의 무늬와 눈을 감고도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은 변하지 않은 구조에 쓸데없이 감동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일어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양복을 벗고 짙은 회색 추리닝 바지와 흰 면 티를 받쳐 입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침대 위로 쓰러진다. 누운 채로 시선을 옮기자, 구석에 놓여 진 기다란 책꽂이 위에 비죽이 튀어 나와 있는 어느 물건에 시선이 닿았다. 천천히 일어나 그 물건을 꺼내어 내렸다. 먼지가 폴폴거리며 함께 내려앉았지만 가볍게 손으로 저어 날려버린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듯 보이는 그 물건은 앨범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은 빛바랜 겉장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까지 내려앉는 추억의 무게를 동반했다.
"오늘은 유우토가 좋아하는 전골 요리나 해 먹을까?"
"...누나, 여름에 웬 전골이야..."
"그래도 너 전골 요리 좋아했잖니?"
...그거야 겨울 얘기고.
"싫어?"
"으응, 아니, 괜찮아. 재료 내가 사 올까?"
"형이 갈려구? 내가 갈께. 형 오랜만에 와서 길 잃을까봐 겁난다. 나."
"...그거 지금 나 놀리는 거 맞지?"
농담을 주고받으며 조금 웃었다. 웃는 것이 어느새 어색해진 느낌에 금세 표정이 굳어진다.
동생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학생 시절, 저녁 반찬 준비를 위해 단골처럼 이용했던 마트를 향해 달렸다. 노을이 진하게 깔린 낮은 하늘을 보면서, 시원하게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두 눈을 꼭 감아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달려 본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을 떠나 그녀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분명 시작은 행복했던 것도 같은데, 설레었던 것도 같은데, ....그 기억이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지. 갑자기 휑하게 비어 버린 공간이 또 한 번 따끔 거렸다.
"이 시간에 괜찮은 고기가 남아 있으려나..."
빈자리에 자전거를 세우고 마트로 들어섰다. 북적북적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재료를 찾는다. 과연,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위치가 조금씩 바뀐 익숙하지 않은 동선에 조금 주춤하고 만다. 일단은 고기부터 손에 넣고 보자!
저녁 시간대라 경쟁률이 높을 것 같은 기분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곳은 이미 아주머니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폭하니 나오는 숨을 참지 않고 뱉어냈다.
"누나, 미안. 나 도저히 자신이 없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전쟁터와도 같은 광경을 무심히 관람할 뿐이다.
"오늘도 꽤 장렬한 광경인데? 어쩌지~?"
"걱정 마! 유우만 믿어!"
"그래?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부탁한다!"
"응!!"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젊은 남자와 어린 여자 아이의 대화를 저도 모르게 엿듣고 말았다. 곧 내 곁을 지나 씩씩하게 앞으로 돌진하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직 유치원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의 뒤통수가 눈 깜짝할 새에 그 아수라장으로 사라지더니, 1분도 되지 않아 가슴에 커다란 고기 팩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나타났다.
"제법인데?!"
나도 모르게 여자 아이를 향해 말을 걸고 말았다. 아이는 주춤하더니 곧 씨익하고 웃으며 고기를 안고 있는 팔에서 힘겹게 손가락 두개를 펴곤 V자 사인을 날렸다.
"아저씨 것도 꺼내 와 줄까?!"
씩씩하게 물어오는 그 모습에 웃기만 할 뿐이다.
"으응, 아저씨는 됐어. 아가씨는 오늘 저녁 반찬이 뭐기에 그렇게 큰 고기를 샀어?"
"전골!"
"헤에..."
이 날씨에 전골을 해 먹는 집이 또 존재하다니...
무방비하게 감탄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사카에구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야 분명 존재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존재와 마주치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그런데 결국 들켜버리고 만다. 쉽게 체념해 버리고, 어떻게 대처할까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열심히 회전하던 생각이 딱, 멈춘다.
"...뭐야, 정말로 사카에구치야? 정말로? 우와, 언제 돌아왔어?!"
이 동네에 도착해서 두 번째로 듣는 시끄럽고, 호들갑스러운 목소리. 여전히 시원한 미소를 자랑하는 곱슬머리 청년은 후줄근한 색 바랜 청바지에 나와 같은 새하얀 면 티를 입고 두 눈을 반짝이며 잔뜩 흥분해 있었다.
"미즈타니..?"
"응. 응!! 나 기억 해?!!"
기억을 못한다면 그것이 더 신기한 일이다. 집에서 잠시 펼쳐 봤던 졸업 앨범 속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넌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에? 그래? ...사카에구치도 마찬가진데?"
"넌,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야."
기분 좋은 미소도, 시원한 눈매도, 정감 있는 목소리도, 따뜻한 시선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정이 넘치는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그가 정말로 놀라웠다.
"후미키! 누구야?"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넋을 빼고 있다가 놀라서 내려다보니 방금 전 그 꼬마 숙녀가 나와 미즈타니를 번갈아 보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에? 아는 아이?"
"아, 어..."
미즈타니는 고기를 건네받으며 소개를 해준다.
"유짱, 인사 해. 이쪽은 사카에구치 유우토, 고등학교 때 같이 야구했던 친구."
"안녕하세요!"
"사카에구치, 이쪽은, 미즈타니 유우"
"유-짱이라고 불러주세요!"
"유우?..."
"응"
"미즈타니?..."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며 묻자, 미즈타니는 짧게 웃으며 간단하게 답해 주었다.
"내 딸."
(2)
2.
녹아버린 얼음이 컵 속에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대학에 다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저 홀로 웬 여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선 딸이라고 소개하는 거야. 어머니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땐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동네 이곳저곳까지 소문이 안 퍼진 데가 없었어... 미즈타니도 힘들었겠지만, 유우짱도 그 갑갑한 공기를 어리다고 못 느꼈을까..."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며 누나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침묵한 채, 얼음만 남은 유리잔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딸'
그렇게 말하고 싱긋 웃는 미즈타니에게 더 이상은 묻지 못한 채, "아아, 그래..?"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으며, 설마 딸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절대 할 수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유우는 엄마를 닮아서 이렇게 귀여운 건가?"
나름 분위기 전환을 시도해 봤지만, 갑자기 어색하게 굳어가는 소녀의 입가와 미즈타니의 곤란한 듯 웃어넘기는 표정에 무언가 실수를 했다고 깨달았다. 당황한 채 얼른 집에 가야 한다고 대충 둘러댄 뒤 다음에 보자는 말만을 남기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결국 고기는커녕 그냥 빈손으로 돌아온 못나빠진 패배자의 모습에 누나가 허탈하게 웃었다.
"부인은? 없는 거야?"
"정확한 사정이야 나야 모르지. 소문으론, 실수해서 생긴 애라, 결혼은 안하고 애만 데리고 왔다던데..."
"실수라니, 녀석이 그럴 리가 없잖아."
"....뭐, 상상이 안가기는 하지만..."
다시 돌아온 내 방에서 우연히 보았던 고등학교 졸업 앨범 속의 미즈타니는 헤벌쭉하고 바보처럼 웃고 있는 사진뿐이었다. 야구부를 담은 페이지에는 미즈타니 말고도 그리운 얼굴이 잔뜩 있었다.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땀에 젖어, 잔뜩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들 웃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가장 속 편하게 웃고 있는 사람이 미즈타니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게 되는 얼굴이었다. 아마 이건, 미즈타니를 알고 있는 녀석이라면 모두 마찬가지 반응일 것이다.
고등학교 3년간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어보진 못했지만 부 활동만으로도 우린 충분한 관계였다.
부족하지도 넘쳐나지도 않는 적당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여름 날, 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은 나무 그늘 아래서의 대화가 갑자기 환청처럼 재생된다.
「유우?」
「응」
「사카에구치 유우?」
「응. 딸이면 사카에구치 유우」
「아들이면?」
「음~ 유우타?」
「뭐야 그게. 성의 없어~」
「뭐 어때. ....넌?」
「응?」
「만약 딸이면 무슨 이름으로 지을 건데?」
「나? 나는.. 글쎄.. 음~~ .....후미코?」
「.....풋하하하하하」
「캬캬캬캬. 멋지지?」
「후미코가~?!」
누나가 알려 준 미즈타니가 살고 있다는 맨션까지 와서 한참을 기다렸다. 벨을 눌러봐도 반응이 없기에 문 앞에 앉아 기다린 지 3,40분쯤 지났을까. 누군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오기에 벌떡 일어나 보았더니 역시나 미즈타니였다.
"...늦었네"
"사카에구치?"
등에는 유우가 곤히 곯아떨어진 채 업혀 있었고, 미즈타니의 한쪽 어깨에는 그녀의 것인 듯, 노란색 유치원 가방이 걸려 있었다.
"지금 퇴근 하고 오는 거야?"
"응~ 사카에구치는 회사 어떻게 하고 온 거야?"
"난 휴가."
"아... 그랬구나..."
"....."
"깜짝 놀랐네."
"응?"
"사카에구치가 있어서, 놀랐다구."
"아아, 미안.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음, 그건 상관없지만~ 잠깐만, 문 좀 열어줄래?"
미즈타니가 등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유우를 들춰 업고 주머니에서 힘겹게 꺼낸 열쇠를 내어주었다. 엉겁결에 받아 열쇠를 꽂아 넣고 돌리자,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즈타니는 나를 지나쳐 손잡이를 열고 들어가 버린다. 문은 저절로 쾅 하고 닫혀버렸다. 한손에 열쇠를 들고, 잠시 멍하니 닫힌 문만을 바라보며 서 있었더니, 곧 현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다시 열렸다.
"뭐해? 안 들어오고."
왠지, 환영받지 못한 느낌에 주저하자 미즈타니가 웃으며, "맥주 한잔 하자" 라고 말했다.
좁게 느껴지는 면적의 조그만 방이었다. 남자 두 사람이 멀뚱히 서 있자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충 자리를 잡고 앉자 미즈타니가 조그만 냉장고 속에서 차가운 맥주 캔 두개를 꺼내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어젠 전화번호도 뭐도 물어보지도 않고 대뜸 다음에 보자! 하고 가버리기에 다신 못 보는 줄 알았어, 나."
"응.. 누나가 얘기해 줬어."
"아아, 그랬구나. 아, 그래서 물어보지 않는 건가?"
"뭘?"
"부인은? 하고..."
"...부인은?"
"나 미혼이잖아."
미즈타니는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고 맥주를 한 모금 삼키더니, 시선을 구석에 눕혀 둔 유우에게 두며 덧붙였다.
"딸은 있지만."
"조금은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순 없는 거야? 친구잖아."
"사카에구치는... 결혼 했다고는 들었어."
"....."
"...결혼식, 초대 해줬으면 좋았을 걸."
"...."
"애 데리고 나타나서 민폐만 끼쳤겠지만... 하핫.."
"..가족들끼리만, 조촐하게 한 거였어. 이제 와서, 연락하기도 좀, 그랬어."
"흐응.."
"...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양손으로 꼭 감싸고 있던 맥주가 점점 시원함을 잃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웠다. 방안에는 조그만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우리에겐 그 바람이 닿지 않았다. 열어둔 창으로도, 바람은 조금도 불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건지 기억엔 없지만, 어쨌든 얼굴은 기억에 있는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조그만 갓난아이를 데려와서, '당신 아이입니다. 나는 키울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니, 대신해서 키워주세요' 라고 말하기에, '네, 그러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순순히 아이를 받아서 열심히 키우고 있는 미혼 남. 미즈타니 후미키"
미즈타니는 꼭 어느 드라마 속 주인공의 프로필을 읊듯 그렇게 말했다.
"...확실해?"
"뭐가아..?"
"...내가 알고 있는 미즈타니는, 그럴 녀석이 아니야."
".....사카에구치가 알고 있는 나는, 어떤 녀석인데?"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딱 한번 아이들과 맥주를 마셔 본적이 있었는데, 미즈타니는 분명 맥주 한잔에도 금세 해롱거릴 정도로 그다지 술을 잘 마시는 타입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고교 졸업 기념으로 감독이 한 캔씩 나눠 준 기념적인 첫 알콜 체험이었고 당연히 익숙하지 않은 그것에 다들 무겁고 멍한 머리를 안고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어색하게 움직이는 팔다리를 느끼며, 알 수 없는 기분에 취해 술이란 거, 꽤 괜찮은 거구나,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후로 대학에 다니면서, 취직을 하면서, 술자리는 자연스럽게 늘어갔고 당연히 술도 꽤 마실 수 있는 체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미즈타니는 여전한 것 같았다. 아직 맥주 캔에 반 이상의 술이 남아 있었음에도, 그는 이미 약간은 붉어진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힘이 없는 시선으로 바보처럼 웃었다.
"사카에구치..."
"응?"
"보면 알잖아."
"....뭘"
"내 딸이야. 닮았잖아. 내 딸 맞아."
그렇게 말하고 침묵을 지키던 미즈타니가 이마로 테이블을 박으며 미끄러지듯 쓰러져버렸다. 깜짝 놀라 녀석을 쳐다보았더니 녀석의 두 눈은 꼭 감긴 채였다. 잠들어 버린 걸까?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만 하다가 이불을 찾아 꺼내와 녀석의 어깨에 살며시 덮어 주었다. 더 이상은 어찌할 수도 없어 테이블 위의 맥주 캔 두개를 정리하듯 들고 일어나 비닐봉지 속에 쑤셔 넣었다. 쓰레기통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연히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결코 깨끗하다고도 깔끔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집이었다. 정리를 해보려고 애쓴 흔적은 눈에 보였지만 정리가 되었다는 느낌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집이었다. 어수선한 풍경에 어느 기억이 겹치듯 떠오른다.
아직 고등학생일 때 녀석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잘 산다고 말할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집이었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집안에선 공기 가득 꽃향기가 배어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신발장 위를 장식하고 있는 꽃병에서부터 집안 곳곳엔 화분이 하나 둘씩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우리 엄마가 꽃을 좋아해" 하고 설명해 주었다. 녀석의 방으로 들어서자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 풍경이 역시나 싶었다. 벽면 한쪽에는 만화책이 가득한 책장과 CD꽂이가 있었고, 침대 위에는 이어폰이 꽂혀진 채로 뒹굴고 있는 MP3가 베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녀석이 털썩하고 침대 위로 엉덩이를 걸치고 앉더니 침대 머리맡 선반에서 조그만 게임기를 꺼내 던져주었다.
"난 요즘은 잘 안 쓰니까 천천히 돌려줘도 돼"
"응. 땡큐"
"뭐 마실래?"
"아니 됐어. 바로 가봐야 돼"
"응.."
사실 특별히 바쁜 일도 없었지만 그렇게 변명을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 곳에 오래있고 싶지 않았다. 그날, 미즈타니에게서 빌린 게임기는 집에 가서도 실행시켜보지 않은 채로 일주일 정도 방치 되어 있었다. 돌려줄 때 미즈타니가 "재밌었어?" 하고 물었다. 나는 게임도 해보지 않은 주제에 어정쩡하게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있어 미즈타니는 그런 이미지였다. 따뜻한 기운이 질투가 날 정도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테이블에 쓰러지듯 누워 잠든 녀석을 흘끗 쳐다보았다. 이유도 없이 가슴 한구석이 갑갑해짐을 느꼈다.
열쇠는 우편함에 넣어두기로 하고 그의 집 열쇠를 쥐고 일어섰다.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현관문 손잡이를 쥐고 돌리자 눈치 없는 소음이 끼익하고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다행히 둘 모두 잠에서 깬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쿨쿨 곯아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3)
3.
여름이라 그런지 역시 더웠다. 낮에는 그냥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기분이었다. 거실에서 부채질을 몇 번하며 뒹굴 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런 내 단잠을 방해한 것은 미즈타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사카에구치 미안해!!!" 하고 전화를 받자마자 귓속을 꿰뚫을 것 같은 기세로 그가 사과를 했다. 아직 잠에 취해 있어 얼떨떨한 채 핸드폰만 쥐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대답을 해 줄 수 있었다.
"...뭐가?"
술주정해서 미안하다는 녀석에게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음에도 녀석은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퇴근시간에 맞춰 역 앞으로 나와 줄 수 있냐고 말했다. 딱히 예정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괜찮다고 대답하자 돌아오는 목소리는 밝은 분위기를 띄었다. 사과하는 뜻으로 밥을 사겠다는 녀석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미즈타니는 그 약속마저 늦었다.
"으와! 정말 미안! 미안해!!"
"아니... 괜찮아."
"그치만! 사과하겠다는 사람이 더 늦게 와서 어쩌자는 건지... 아 정말 전철이 사고 때문에 늦지만 않았어도!!"
"하핫.. 괜찮다니까.."
미즈타니는 단골이라며 작고 낡은 술집에 나를 데리고 갔다. 저녁시간대니까 가게에 발을 들이는 것엔 별 저항이 없었지만 어제의 술주정을 사과한다며 선택한 곳이 술을 파는 곳이라는 것이 재밌었다.
"걱정 마. 난 술 안 마실 거니까"
"별로 상관은 없는데.. 그런데 왜 여기야?"
"굳이 술이 아니어도 여기 꽤 좋아. 메뉴도 많고, 무엇보다 맛있거든."
"흐음..."
뭐, 개인적으론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그의 선택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미즈타니는 차가운 우롱차를, 나는 맥주를 한 잔씩 주문하고 즐겼다. 사람들도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라 작게 이야기해도 서로에게 충분히 전달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아늑한 것이 왜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즈타니는, 역시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유우는?"
"아, 응. 오늘은 어머니가..."
"...어머니?"
"응. 우리 엄마. 손녀딸 보고 싶다고, ...."
"아아..."
얘기를 들어보면 딱히 집에서 그를 등 돌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는 왜 익숙하지도 않은 생활을 선택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묻기에는, 시간만큼 벌어진 공간이 어색하게 자리 잡고 있어 궁금한 채로 묻었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아직 미즈타니가 무슨 일을 하고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데 너... 무슨 일 해?"
"...아, 하하.. 말하기 쑥스러운데..."
"에? 왜?"
"나, 출판사에서 일 해."
"...... 정말?!!"
미즈타니는 내 반응에 정말로 부끄럽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민망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고등학교 내내 가장 어려운 과목이 고전이라고 말할 정도로 문학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그야말로 미즈타니를 두고 생긴 말 같게도 느껴졌다.
"어쩌다가?"
"...그러게 나도 어쩌다가 내가 이 일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어."
"하핫.. 너답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조금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대체로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가며 대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야기의 화제는 서로의 생활 깊숙한 곳을 찌르지 않고 비켜갔다. 침범하기 어려운 경계선을 느끼며, 그 주변을 더듬어가기만 할 뿐인 대화였다. 그것만으로도 우린 묻고, 답해줄 것이 참으로 많았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다가 적당히 자리를 접고 일어섰다. 맥주 몇 잔에 조금 취기가 돈 나는 녀석을 의지하지 않고 멋대로 걸었다. 조금 빠른 걸음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즈타니는 한걸음 늦게 내 뒤를 따랐다. 거리에는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여름인데도 바람은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내일 비 오겠다..."
별 생각 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미즈타니가 "그러네.." 하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사카에구치는 여전하네."
"응?"
"머리가 항상 짧잖아..."
"에? 하하. 그래? 응... 귀찮으니까..."
"...그래서 항상, 목이 드러나 있어. 뒤에서 보면 목선이 곧게 뻗어 있는 느낌이라서, 한눈에 들어온다고 할까..."
"헤에.. 그래?"
미즈타니의 뜬금없는 장황한 감상에 괜히 신경 쓰여서 뒷목을 쓸곤 웃었다. 미즈타니도 반응하듯 짧게 웃고 이번엔 나를 지나쳐 앞서 걸었다.
"유우 엄마가..."
미즈타니는 '아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결혼을 한 적도 없고 하다못해 동거를 해 본 사이도 아닌 것 같으니 아내라 부르기도 어색할 것이다.
"그녀가 꼭... 사카에구치 같은 목선을 하고 있었어."
"....헤에.."
뭐라고 반응해줘야 할지 몰라 그렇게 넘겼다.
"다른 건 잘 기억 안 나는데 그건 기억나. 그녀가 머리를 위로 올리고 목이 드러난 원피스를 입을 때 뒤에서 보면 꼭 사카에구치가 생각났었어."
".....미즈타니.."
"응?"
내가 불러 세우자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왜?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먼 추억을 회상하듯 얘기하는 미즈타니의 말투에서 미련을 느꼈다. 기억을 쫓으며 얘기하는 그 목소리는 다정하게 속삭이는 느낌을 품고 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질문을 했다.
"...넌,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건...."
"....하핫.."
우물쭈물하며 던지는 내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미즈타니는 크게 웃으며 부정했다.
"아냐. 아냐."
"...그래..?"
"응. 아냐."
또 한 번 습한 바람이 불었다. 미즈타니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을 뗐다.
"내일, 정말로 비오겠다..."
"그러네...."
이번엔 내가 그렇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대화도 없이 어색하게 마주보고 서 있게 되었다. 미즈타니는 할 말도 없으면서 가만히 내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창피했음에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것은 더 창피했으므로 그냥 무뚝뚝하게 서 있었다.
미즈타니가 웃었다. 그는 참 자주 웃었다. 나도 이끌린 듯 따라 웃었다. 내가 이유도 모르고 따라 웃자 미즈타니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먼저 등을 돌렸다. 혼자서 걸어갔다.
(4)
4.
일어나기가 힘이 들었다. 이상하게 눈꺼풀이 무겁다 싶더니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어 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어제의 일이, 녀석과의 만남이 몇 시간 지나지 않았음에도 먼 과거의 일처럼 회상되었다. 어딘지 멀게 시선을 던지며 돌아서던 녀석의 뒤통수가 바람에 저항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그 뒷모습만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야구부 그라운드로 향하던 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져 미즈타니와 나는 등나무 아래서 잠시 비를 피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녀석들은 어디에 있었는지 어째서 둘만이 그 곳에 존재했는지 자세한 경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평범한 하루였을 것이고 특별한 이유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즈타니는 비를 피하면서도 어딘지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하고 묻자, 으응, 아무것도 아냐. 비 온다. 시원하다. 등등 여전히 들뜬 듯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뭐, 미즈타니니까, 하고 멋대로 이해했다. 넌 언제나 즐겁잖아. 그렇게 속으로 쏘아주며 녀석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난 비오는 날 별로 안 좋아하는데... 방에 들어가면 이불이 눅눅하잖아."
"아, 그런가? 하긴... 그럴지도... 나는 그런데 둔하니까."
"흐음... "
"사카에구치?"
"응?"
"왜 그래?"
"....뭐가?"
"...... 지금 재미없는 표정을 지었어."
".......그랬나?"
속으로 비아냥거리고 있었으니 표정이 좋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땐 왜 그렇게 꼬여있었는지 모르겠다. 충분히 '즐거운 우리 집'이었는데, 미즈타니와 함께 있으면 어째서인지 주눅이 들었다. 하나하나 비교해보게 되었다. 그러면 항상 기분이 나빠졌다. 미즈타니를 향해 질투를 하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저 부러웠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땐 그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잠이 다 깨었다. 나는 느릿하게 움직여 화장실로 향했다. 오늘은 또 뭘 하고 보내나 싶었다. 어차피 쉬려고 찾아오긴 했지만,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놀고만 있으려니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불편했다. 그러나 딱히 할 일은 없고, 그래, 기왕 받은 휴가니까... 하고 넘겨버리고 만다.
"점심 때, 병원 다녀온다고?"
"응... 약도 받아야 되고..."
"데려다 줄까?"
"뭘.. 그냥 천천히 걸어서 다녀올게"
"꽤 멀잖아."
"괜찮아, 괜찮아."
누나가 챙겨주는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면서 신문을 펼쳤다. 정치야 어차피 나랑은 관계없는 세계고, 먼저 경제면부터 펼쳐보았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저절로 회사일이 걱정 되었다. 맡고 있던 일도 대충 떠넘기듯 하고 왔는데, 뒤에서 욕 많이 하겠다 싶으니 씁쓸한 미소가 번지고 만다.
"비도 오는데, 정말 괜찮겠어?"
"응... 덕분에 선선하니까, 괜찮아, 괜찮아. 내가 뭐 큰 병 있는 건가. 그냥 속이 탈 난건데 뭐."
그래도 걱정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는 누나를 보고, 눈썹을 늘어트리며 인상을 써 주었더니, 누나가 피식하고 웃었다.
"알았어. 걱정 안 해"
"그래야지."
비는 심하게 뿌리진 않았지만, 꽤 끈질기게 이어졌다. 점심때 잠깐 병원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엔 서점에도 들렸다. 서점에 간 김에 책도 몇 권 구입하고,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도 한잔 하며 책을 조금 읽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오후 3시가 훌쩍 넘어간다. 가는 길에 장이나 볼까, 싶어서 핸드폰을 꺼냈다. 누나에게 메일을 보내려고 문자판을 만지작거리며 걸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작은 물방울이 튄다.
누나의 부탁을 받아 마트에서 생선을 샀다. 비가 오니까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한다. 마침 나도 그랬기에 신이 나서 생선을 골랐다. 그러고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는데 누군가 내 허리부근을 꾹꾹 눌러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더니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더 아래에서 들려왔다.
"사카에구치 군"
어린 목소리가 내 이름에 '군'을 붙여 부르니 이상한 기분이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 곳에는 유우가 과자봉지를 하나 들고 서 있었다.
"유우짱?"
"사카에구치 군. 뭐해?"
"........아, 뭐... 장보고 있었어. 넌? 왜 혼자야?"
"유우는 원래 혼자 잘 다녀"
혼자 두고 가긴 뭣해서 그녀가 계산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유우는 달랑 그것 하나를 계산하고 쪼르르 나에게로 달려왔다.
"정말 혼자야? 아빠는?"
"아빠? 아~ 후미키?"
"...응. 후미키..."
참 재미난 부녀다. 유우는 미즈타니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듯 했다. 그렇다고 미즈타니도 아니다. 후미키다. 덕분에 난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불러본 적도 없는 그의 이름을 이렇게 쉽게 입에 담게 되었다.
"후미키는 오늘 늦어. 그래서 오늘은 유우 혼자 집에 가는 거야"
"혼자서 집에 갈 수 있어?"
"사카에구치 군은 혼자서 집에 못 찾아 가?"
"에...."
"사카에구치 군이 가면, 나도 갈 줄 알아."
"....미안."
"괜찮아."
유우는 당돌하고 똑똑해 보인다. 이럴 때 보면 역시 미즈타니를 닮지는 않았다.
- 또?! 넌 대체 왜 심부름만 보내면 옆길로 새는 거니?
"미안, 누나. 우연히 만나서... 혼자 보내기도 좀 그렇잖아..."
- 어휴, 난 몰라. 알아서 해. 늦게 와서 밥 내놔라 하지 말고 그 생선은 유우짱 하고 저녁이나 해 먹고 와.
"응... 미안."
나는 결국 유우를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보내기도 뭣하고, 미즈타니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니 애가 밥이라도 굶을까봐 걱정이 되어 미즈타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우는 내가 자신과 놀고 싶어서 따라온다고 생각한 건지, 집에 가면 뭐하고 놀까? 사카에구치 군 종이접기 좋아해? 라는 말을 걸어오며 신이 나서 걸었다. 걷는 뒷모습이 참 예뻤다.
나는, 결혼하면 가장 먼저 아이가 갖고 싶었다. 아내는 아이가 빨리 생기는 것을 싫어했다. 결말이 이렇게 났으니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미즈타니는 결혼도 안했으면서 딸이 생겼다. 나는 오랜만에 녀석을 향해 질투해 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우는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입고 있던 겉옷은 벗어서 단정하게 걸어놓았다. 유치원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가 싶더니 색종이였다. 색종이를 카드처럼 펼쳐들고 크게 미소 짓는다. 나는 그래서 그녀와 함께 마주보고 앉아 기억도 안 나는 색종이를 접느라 진땀을 뺐다. 곰실거리며 움직이던 손이 멈추더니 종이배가 탄생했다. 유우는 종이배를 나에게 선물했다. 그것을 조심히 건네받았다.
슬슬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쌀을 씻었다. 된장국을 끓이고 있는데 유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사카에구치 군" 하고 나를 부르기에 내려다보았더니 무언가 앞으로 쑥 내민다. 졸업앨범 이었다.
"후미키가 이거 보면서 가르쳐줬어."
"가르쳐주다니, 뭘?"
그녀가 팔락거리며 페이지를 넘기기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주시했더니, 펼쳐진 페이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사카에구치 군."
손가락으로 고등학교 3학년인 나를 가리킨다.
"후미키가 그랬어. 사카에구치 군, 여기 있대"
밥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마쳤음에도 미즈타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냉장고를 멋대로 뒤져 유우를 위해 사다 놓은 듯이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고 TV를 보고 있었다. 유우는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선 열심히 그림을 그리다가 TV를 한번 보고, 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점점 깊어져 어느새 9시가 되어있었다.
전화 한통 없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유우는 집에서 이렇게 혼자 있는 걸까. 날이 어두워지면, 무섭지 않을까. 불안하다거나, 쓸쓸하다거나... 아니면,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이것이, 미즈타니와 그녀의 생활인 것일까.
미즈타니가 유우를 업고 퇴근하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당연하게도 매일 그렇게 어딘가에 유우는 맡겨지고 시간이 되면 데리러 가는 생활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유우는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미 적응했다는 듯 여유를 보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을 그리던 유우가 '아!' 하고 작게 소리를 지르더니 벌떡 일어난다.
"왜 그래?"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며 찾던 유우가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가까이 왔다.
"사카에구치 군! 유우랑 여기 가자!"
"응?"
그녀가 내민 것은 홍보 전단지였다. 이 동네에서는 매년 여름엔 꽤 큰 규모의 불꽃놀이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변함없었는지, 그 불꽃놀이를 홍보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날짜를 보아하니, 그리 멀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을 때이다.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현관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갑자기 열려 순간 등줄기가 싸해졌는데, 당연하게도 문을 열고 들어 온 것은 미즈타니였다.
"후미키!!"
유우가 반기며 달려들었고, 미즈타니는 그런 유우를 안아들고 눈을 껌벅거리며 서 있었다.
".........놀랐잖아."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사카에구치, 여기서 뭐해?"
유우를 집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비는 그쳐있었다. 미즈타니가 조금만 배웅해준다며 따라 나왔다. '조금만'이라니, 어디까지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버려뒀다. 걷고 있는데 대화할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어색해졌다.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 아,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래, 이런 건,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하지 않겠는가.
"나 유우짱이랑 데이트할 건데. 허락해 줄래?"
"어? 데이트?"
"왜 있잖아. 매년 하는 불꽃놀이..."
"아..."
"거기에 같이 가자더라, 그래서 같이 가기로 했어."
".......하핫"
"허락해 주는 거지?"
"그래, 허락해 줄게. 대신 나도 가"
"에에? 아빠 끼고 하는 데이트가 어딨냐?"
우리는 그 이야기로 조금 웃었다. 미즈타니는 어딘지 모르게 쑥스럽게 웃었다.
“오늘 고마워”
“뭐가...”
“유우랑 같이 있어줘서...”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름 충고랍시고 던져놓는다.
“어린애 혼자 집에 오래 두는 거 아냐. 아무렇지 않은 듯해도, 사실은 많이 심심하고 외롭다고...”
“응...”
나도 혼자 보낸 시간이 길었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아버지는 셋이나 되는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회사에 오래 남아 있어야만 했다. 차라리 아주 어릴 때는, 누나도 동생도 함께 집에 있었으니 덜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나는 점점 바빠졌고, 동생 또한 친구와 어울려 다니게 되면서 집은 거의 비어 있고 그럴 때마다 나는 혼자였다. 딱히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외로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외로움에 흠뻑 취해있었던 시기 같다. 그것은 부작용을 낳았는지,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혼자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저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여기저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쉴 새 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던 유우를 보면서 나는 나를 생각했다. 유우 또한, 나와 같이 외롭고 심심할 것이라고 멋대로 단정 짓고, 그녀를 동정하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 내가 뱉은 이 한마디는 쓸데없는 간섭일지도 모르겠다. 주제넘었다고 생각하고 뒤늦게 사과를 하려는데 미즈타니가 먼저 말했다.
“그래도, 사카에구치”
“응?”
“이게 우리야. 유우랑 나는 이렇게 사는 거야.”
나는 미즈타니의 그 한마디에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래”
인정할 뿐이었다.
(5)
5.
유우와 약속한 날이 벌써 내일로 다가왔다. 그 말은 즉, 내가 여기에 남아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가 된다. 나는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보며 햇빛도 쐬지 못하고 말라버린 빨래를 개고 있었다. 내일은 날이 좋을까 모르겠다. 만약 비가 내리기라도 한다면 유우가 크게 실망할 것이다.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래볼 뿐이다.
손이 멈춰버렸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동생이 다가와선 등을 맞대고 앉았다. 손에는 게임기가 들려 있었다. 등 너머로 들려오는 그 우스꽝스러운 전자음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놀지 말고, 빨래나 개지?”
“형이 심심할까 봐. 내가 양보하는 거잖아.”
“놀리냐?.”
결혼 후 나는 이 집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은 이곳이 아니라 ‘내 집’ 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명절 때도 바쁘다는 핑계를 둘러대는 나를 가족들은 탓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쪽이 찾아오면 되는 거지 뭐. 하고 동생이 교토까지 찾아왔을 때는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등 돌리고 살았으면서 정작 내가 도망치고 싶을 때는 서슴없이 이곳을 찾았다. 꽤나 비겁한 짓이다.
내가 비운 자리는 이미 이 집에서 매일을 보내던 그때의 편안함하고는 성질이 다른 무언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약간의 불편함을 동반했다. 이 느낌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내 자리를 비워버린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거, 이상한 느낌 들지 않냐?”
“당연히 이상하지. 형을 집에서 보다니, 꿈이라도 꾸는 느낌이다.”
“괜히 왔나......”
“형.”
“응?”
“솔직히, 형이 여기 있는 거, 낯선 느낌이기도 한데, 그 낯설다는 게, 이상하지만은 않아.”
“아깐 이상하다며.”
“아니 그니까... 아, 뭐래야 되지. 이상하다기 보단, ....음, 뭐 그런 게 있어."
등을 맞대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마치 나를 내려다보듯이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기분이 나빠서 인상을 썼더니 그것을 알아챘는지 팔짱까지 끼곤 싱글거리고 있다.
“그만 해라.”
“뭘.”
“형님 내려다보는 거 아니다. 아우야.”
“형.”
“또 왜.”
“오랜만에 보니까, 형도 꽤 남자다워 졌다.”
“농담 하냐. 내가 나이가 몇인데”
“난 누나가 둘이다! 하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이젠 형 취급 해줘야겠어.”
“너 진짜!”
“하하핫”
다 큰 남동생을 끌어안고 뒹굴었다. 자꾸 건방지게 형을 놀려대는 것이 괘씸해서 오랜만에 녀석을 쓰러트리고 항복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이렇게 몸싸움을 벌이는 일도 없었는데, 설마 이 나이가 되어서 형제 싸움을 하게 될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공간은 나에게 어색함과 불편함을 선물했지만, 가족은 변함이 없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아도, 마치 어젯밤에 헤어진 사이마냥, 오히려 ‘오랜만’이라는 말이 어색하다. 더 이상 이곳을 내 집이라 생각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가족은 내 가족임에 틀림없다.
“.....뭐하니?”
거실바닥을 뒹구는 나와 동생을 누나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누나는 과일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었고 그 뒤로는 아버지가 신문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 어색하게 웃을 뿐이다.
“어? 누나. 뭐야? 디저트?”
“오늘은 저녁이 좀 기름졌잖아. 입가심이라도 하라고...”
동생은 누나가 들고 온 쟁반에서 과일 하나를 집어 입 속에 넣고 오물거린다. 나는 아버지가 소파에 앉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동생이 괜히 예의를 차리게 되는 나를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무릎을 툭툭 건드리며 묻는다.
“아빠, 형 많이 변했죠?”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소심하게 과일 끄트머리를 살짝 씹어 삼키는 나를 보며 그는 말했다.
“변하긴, 여전하네.”
“에? 내가 보기에는 많이 변했는데...”
“네가 나 보다 네 형을 더 오래 봤냐?”
“........그건 아니지만요.”
“유우토는 하나도 안변했어.”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어째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방으로 돌아와 이유 없이 또 한 번 졸업 앨범을 꺼내 펼쳤다. 고등학교 때 함께 했던 야구부 멤버들을 한명한명 찾아보았다. 다들 어디서 무얼 하고 살고 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마지막으로 미즈타니를 찾았다.
여기 도착한 이후로 거의 매일같이 만나던 미즈타니를 요 며칠 보지 못했다. 그들의 사정에 멋대로 개입해 충고를 늘어놓았던 것이 쑥스러워 다시 만나는 것 또한 꺼려지기는 했지만, 옛날에도 지금에도 미즈타니와 나는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만나야 할 약속을 잡을 수가 없었다. 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굳이 따져보자면 꽤 친한 사이였음에도 고등학교 시절의 우리는 그렇게 특별한 이유 없이 만나자는 말을 쉽게 뱉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젠 각자의 생활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했고 함께 무엇을 하고 있는 처지도 아니라 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더욱 까다로워졌다는 것뿐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휴가 기간이라 될 수 있으면 더 많이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기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는 나와는 달리 회사에 나가야만 했고 유우와의 생활만으로도 여유가 없는 듯이 보여 도저히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우와 한 약속이 있기에 내일이면 다시 만날 수 있다. 갑자기 소풍을 앞둔 어린애처럼 마음이 동요했다. 아마도 나는 이곳에 와서 미즈타니와 만날 수 있었음이 꽤나 기뻤던 것 같다. 졸업앨범을 닫고 대충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두고 자리에 누웠다.
강을 따르는 길 위에는 여러 종류의 노점상이 줄을 이었다. 해는 이미 졌는데 여기저기에서 은은한 불빛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나와 미즈타니, 유우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유우는 분홍색 유카타를 입고 머리를 한줌으로 말아 올린 모습이었다. 설마 미즈타니의 솜씨일까? 싶어 물었더니, “어머니가....”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자리를 잡고 앉아 느긋이 불꽃놀이가 시작됨을 기다리고 싶었지만 둘러보기 바쁜 유우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그럴 수는 없었다. 유우의 한 손에는 솜사탕이, 또 다른 손에는 바람개비가, 그리고 머리 위에는 가면까지 하나 얹어져 있다. 미즈타니를 돌아보니 그 역시 타코야키를 들고 우물거린다. 아아, 이것은 여름 축제였다.
나는 아내와 한 번도 여름 축제를 찾지 않았다. 우리는 여행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 우리에겐 이렇다 할 추억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함을 느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쓸쓸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들떠 있었지만 그녀에겐 그런 기본적인 것에서는 가슴이 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쓸쓸함이 곧 나에게로 전염되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쓸쓸했고 외로워하다가 끝이 났다. 처음에는 끝까지 함께 해주지 않는 그녀를 원망했는데, 지금은 다 내 잘못 같이 느껴져 많이 미안하다.
“후미키!! 여기, 여기 금붕어 잡아줘!!”
멀리서 유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미즈타니는 다 먹어가던 타코야키를 나에게 건넸다.
“먹을래?”
“이제라도 물어봐줘서 정말 고맙다.”
나는 하나 남은 타코야키를 받았다.
미즈타니의 금붕어 낚기 실력은 형편없었다. 보다 못한 아저씨가 서비스로 하나를 비닐 주머니에 그냥 담아줄 정도였다. 유우는 그렇게라도 얻은 점박이 금붕어가 좋아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늘어선 노점상을 차례로 순회한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새 유우는 다른 가게 앞에서 우리를 불렀다.
“후미키!! 닭 꼬치 사줘!”
정신을 놓고 있던 미즈타니는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이 뒤돌아보고, 유우를 찾고, 그녀를 향해 뛰어가고, 허리를 숙여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결국은 유우가 원하는 것을 선물해주고 만다. 지켜보고 있자니 이미 훌륭한 아버지다.
“저 후미키라는 소리를 삼분에 한 번씩 안 들으면 불안해져.”
“하핫”
“그래서 내가 회사에서는 정서불안이잖아.”
결국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곳곳을 둘러보고 다녔다. 더 이상 구경할 것이 없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가 있었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위를 향한 시선들은 언제 불꽃이 터질까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유우는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았지만 미즈타니의 시선이 벗어나는 곳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후미키!”를 들었다. 그러면 미즈타니는 손을 흔들며 “그래~”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
“고등학교 때, 너 많이 질투 했었어.”
“응?”
“너한테 빌렸던 게임 기억 해?”
“내가 빌려준 게임이 한두 개여야 기억을 하지...”
“왜 있잖아. 내가 처음으로 너희 집까지 가서 게임기 채로 빌려갔던 거.”
“아아, 응”
“뭐야, 이렇게 말하면 기억 해?”
“응. 사카에구치가 처음으로 내 방에 온 날이잖아? 기억하지!”
“그거 사실은, 한 번도 플레이 한 적 없어. 재밌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어.”
“우와, 너무한다!”
그렇게 말하는 미즈타니의 동작이 어딘지 과장되어 있어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라고 되물으려고 할 때 “사실 알고 있었어.”하고 웃는다.
“어? 어떻게?”
“게임기 안에 들어있던 거, 다른 게임이었어. 내가 다른 거 플레이한다고 넣어뒀던 건데 그걸 깜박하고 그대로 빌려줬지 뭐야. 그래서 다음 날 만나면 사카에구치한테 혼나려나... 싶어서, 원래 빌려주려던 게임을 들고 학교에 갔는데, 사카에구치는, 그런 말 안하더라. 며칠 뒤에 돌려주면서 재밌었다고 했잖아. 그래서 알았어.“
그 대답에 머쓱해져서, 미안, 하고 중얼거렸다.
“이제 옛날 일이고, 괜찮아. 그때의 나는 상처를 받았지만!”
“.....미안하다. 내가 그때, 사춘기였어.”
“푸하핫”
“뭐가 웃기냐?”
“웃기잖아. 사카에구치가 사춘기 운운하는 게”
“....그런가?”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데 또 멀리서 “후미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삼분에 한 번씩인지가 궁금해져서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잴 준비를 하고 만다. 시간을 확인하니 슬슬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데 이번엔 미즈타니가 나를 불렀다.
“사카에구치, 나도 뭐 하나 알려줄까?”
“응? 뭐? 아, 유우! 곧 시작할 거 같애! 돌아와!”
벌떡 일어서서 유우에게 자리에 돌아오라고 소리를 쳤다. 유우는 내 목소리에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다. 미즈타니도 같이 일어서선 엉덩이를 털어내는 흉내를 했다. 그러더니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나 사카에구치 좋아했었어.”
처음엔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내가 미즈타니를 돌아 본 것과, 유우가 미즈타니의 품으로 달려 든 것과, 하늘 위로 불꽃이 쏘아 올려 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갑자기 하늘을 울리는 폭발음에 사람들이 놀라 환호를 하며 일어섰다. 미즈타니도 유우를 안아들고 그 화려한 유희에 입을 벌리고 감탄을 내뱉는다. 나는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어 그런 미즈타니의 옆모습만을 보고 서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 챈 미즈타니가 그런 나를 보더니 한마디를 더 했다.
“지금도 좋아해.”
주변에서 또 한 번의 환호가 터졌다. 바람에 실린 희미한 화약 냄새를 느끼며 나는 어렵게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엔 무수한 빛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연이어 터지는 색색의 불꽃이 각각 다른 형태로 번졌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그들은 한껏 자태를 뽐내고 찬란하게 저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온몸을 던진 희생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새 땅만 쳐다보게 되었다. 옆에서는 유우가 "후미키!" 하고 소리쳤다.
집에 도착해 머리를 끌어안고 누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떠올려보기도 한다. 불꽃이 더 이상 하늘 위로 날아오르지 않을 때 나는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다. 뒤에서 유우가 부르는 목소리도 들렸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풀썩하고 쓰러졌다.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하자 이제는 화가 난다.
미즈타니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걸까. 그것은 분명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좋아해'였다. 나는 녀석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간단한 그 한마디에 겨우 가까워져가던 과거의 우리가 다시 멀찍이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세수를 해서 날려버리려고 급하게 방을 나서려다가 어딘가에 부딪혔다. 어제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그것에 손을 대지 못한 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6) END
6.
“다 챙겼니?”
“응. 근데 누나, 반찬 너무 많은 거 아냐?”
“이제 혼자 생활하잖아. 많아서 나쁠 것도 없는데, 넉넉히 가지고 가.”
“집에서 먹을 시간 없어. 그냥 적당히 넣어...”
“너, 또 편의점 도시락에 의존하면 속에 탈난다. 제대로 챙겨 먹어. 다 갖고 가!”
“으....”
다시 교토로 돌아갈 날이 왔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온 시간에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 이틀 뒤부터 복귀하게 될 직장 생활이나 이젠 혼자서 살아야 할 앞으로의 날들이 두려움처럼 느껴졌다. 누나는 그런 나의 불안함을 눈치 챈 것인지 이것저것 담아주며 말이 많았다. 끼니는 거르지 말고 챙겨먹어라, 일도 무리하지 말고, 시간이 없어도 잠은 푹 자고, 자잘한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사나이답게, 대범하게.... 그 말들이 어딘지 웃기게 들려서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으며 듣고 있는데 마지막에 누나가 덧붙인 말에는 웃음이 멈췄다.
“힘든 일 있으면 전화 해. 혼자라 생각지 말고, 너한텐 가족이 있잖아.”
불룩해진 짐 가방을 벽에 세워두고 다시 한 번 잊은 것은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는데 누나가 물었다.
“미즈타니한테 인사는 했니?”
“........”
축제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늘까지 특별히 밖에 나가는 일 없이 늘 집에만 있었다. 누나가 한번 “요즘은 미즈타니 만나러 안 나가네?“ 라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내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꼈겠지만 누나는 더 이상 자세한 일은 묻지 않게 되었다. 누나는 나름대로 나와 미즈타니가 싸우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결론을 내린 듯했다. 지나가는 소리로 ”미즈타니, 좋은 애야.“ ”애가 참, 착하지?“ 하고, 그의 편을 들어주는 듯 한마디씩 하곤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너 언제 또 올지 모르고...”
“이젠 자주 올 거라니까....”
“....미즈타니가, 언제까지 여기에 있는다는 보장도 없고....”
“.........”
“훌쩍 이사라도 가버리면, 연락할 방법도 없잖아. 친구잖아. 가서 인사하고 와.”
나는 미즈타니 집 앞까지 와서 서성거리고 있다. 그 날 장난처럼 내뱉은 그의 고백을 들은 후론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어 이대로 돌아가 버릴 작정이었지만 막상 내일 당장 이 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누나 말대로, 아무런 인사 없이 가버린다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결혼식에 불러줬으면 좋았을 걸, 하고 말하며 서운해 하던 미즈타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결국 결심을 하고 미즈타니의 집까지 찾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역시 한껏 의욕에 타오르는 것은 그 순간뿐인지라, 여기까지 오니 초인종을 누르기엔 상당히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도 뭣하고,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기에 나는 결국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미즈타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현관문이 열렸다. 미즈타니는 나를 보더니 약간 당황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곧 평상시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가 웃으며 물었다.
“돌아가?”
“응, 내일. 오전 중에 갈 거야."
“그래, 배웅 못 가겠다.”
“.......들어가도 돼?”
내 말에 미즈타니는 가볍게 웃음을 토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는 영문을 몰랐다.
“하핫, 미안.”
“....뭐가 웃긴데?”
“아니, 내일 돌아간다고, 이렇게 집까지 찾아 온 사카에구치가, 너무 사카에구치다워서.”
방은 의외로 시원한 공기가 감돌았다. 벽 한쪽에 붙어있는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선풍기가 방 한가운데서 그 바람을 조종하고 있었다. 방에는 미즈타니 만이 있었다. 유우는? 하고 묻자, 어머니가. 하고, 언젠가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혼자 있는데 너무 사치 부리는 거 아냐?”
나는 나도 모르게 리모컨을 들고 돌아가는 에어컨을 꺼버렸다. 미즈타니는 별 말 없이 돌아서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곤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오더니 나에게 건넸다.
“맥주 한잔 해야지?”
“너도 마시려고?”
“한모금만 마실게. 절대로 쓰러지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앉아 맥주를 마셨다. 미즈타니는 어색한 공기를 무마시켜보려고 했는지 TV를 튼다. 시선을 화면에 두고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나는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집 안까지 들어와 맥주까지 얻어 마시고 있는 걸까. TV를 향해 고개 돌린 미즈타니를 보면서 무언가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우린 분명 나눠야 할 말이 있을 터였다. 나는 우물쭈물 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내 입에서 튀어 나온 것은 최악의 질문이었지만 그것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왜 하필, 나를 좋아해?”
미즈타니는 그 질문에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곧 TV를 끄고 시선을 마주쳐 왔다. 들고 있던 맥주 캔을 그제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잔인하다. 사카에구치”
그리고 또 한 모금을 마신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미즈타니한테서 나올 대답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적을 깨고 그가 꺼낸 말은 내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마지막인데, 우리 유우 못 보고 가네. 유우가 많이 서운해 하겠다.”
“어?”
“유우가, 사카에구치 많이 좋아 했었어. 누가 내 자식 아니랄까봐. 하하핫....”
“.....취했냐?”
“아니.”
일부러 말을 돌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대충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유우 얼굴 보고 싶은데. 며칠 못 봤더니, 많이 보고 싶더라.”
“우리 딸이 좀, 매력이 있지.”
“.........”
“히힛”
장난처럼 말하며 작게 웃음을 흘린다. 나는, 미즈타니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렁뚱땅 얼버무리며 도망가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 보고 싶었냐?”
예상대로 미즈타니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너만 보고 싶었던 건 아냐. 친구들 모두, 가끔 생각나면, 엄청 보고 싶어”
“.....난, 여기에 돌아오기 전 까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
“응. 알 것 같아. 나는 아직 이곳에서 살고 있잖아. 조금만 눈을 돌려도 금세 옛 기억이 떠올라. 그래서 더더욱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이사 갈 거니?”
“아니, 왜?”
“그냥, 왠지 그렇게 들렸어.”
“흐응...”
그리고 또 대화가 끊겼다. 나는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벽에는 그 날, 축제 날, 유우가 머리에 얹고 있던 가면이 있었다. 구석진 곳에는 유우의 유치원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또 한쪽 벽면에는 미즈타니의 양복이 구김 없는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나는 방을 한번 둘러보고 일어섰다. 미즈타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가려구?”
“응.”
“.....응.”
문을 열고 밖엘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사이 내릴 거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우산은 없었다. 다행히 빗줄기가 세지는 않아, 맞고 가도 무리 없을 듯 보였다. 나는 대충 한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밖으로 나왔다.
“뭐야, 비 오잖아. 우산 쓰고 가. 빌려줄게.”
“돌려줄 수가 없잖아.”
“아, 그렇지. 괜찮아. 그럼, 그냥 줄게. 안 쓰는 우산 있어.”
미즈타니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붙잡았다. 됐어. 하고.
안으로 향하던 그의 몸이 멈췄다. 나는 작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사카에구치.”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불린 내 이름에 걸음이 멈췄다.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미즈타니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얘기를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뒤 돌아 섰다. 비가 툭, 툭, 하고 손 등을 적시는 것을 느끼며 그를 보았다.
“사카에구치, 나는 유우를 혼자서 기를 생각은 없어.”
그 한마디는 예상과 다른 내용이었기에 어리둥절했다. 그는 재빨리 덧붙인다.
“좋은 여자 있으면 연애하고 결혼해서 유우와 함께 셋이서 살 거야. 행복하게. 사카에구치가 나를 또 질투할 만큼 재미있게 살 거야.”
"....그래”
미즈타니는 잠깐 사이를 두고 말했다.
“나는 언제까지나 사카에구치를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잊으려고 노력중이고, 그리고 언젠간 잊게 되겠지.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사카에구치도 혼자서 살지 말고 좋은 사람 있으면 다시 시작해. 그리고, 사카에구치든, 사카에구치의 아내든, 누군가를 닮은 아이를 낳아.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
그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잠깐만, 하고 손짓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우산을 들고 나왔다. 가늘고 긴 비닐우산을 나에게 건넨다.
“서로 그렇게 살다가, 한번 만나자. 서로의 가족과 함께, 한번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얘기해 주자.”
“.......”
“그러니까, 행복해. 건강하고. 또 보자.”
아침인데도 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속에서도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따라 나온 누나와 동생은 이별하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꽤나 눈에 띄었다. 나는 곧 들어올 전철을 기다리며 짐 가방을 든 손에 힘을 실었다.
“그럼, 갈게.”
“응. 도착해서 전화하구...”
“응.”
누나는 그 뒤로 말이 없었다. 나는 전철이 들어오는 신호음을 들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
“....뭐가?”
“걱정하게 해서 미안.”
“.....누나가 동생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지. 그게 왜 미안하니?”
“.....난 내 동생 걱정 해 본 적 없는데....”
“앗, 형! 그러기냐 진짜?”
“하핫....”
가볍게 농담으로 얼버무리는데 누나가 미소 지으며 내 손을 잡는다.
“나는 항상 너를 걱정하지만, 한 번도 너를 믿지 않은 적은 없었어.”
“....”
“넌 자랑스러운 내 동생이고, 열심히 살고 있는 것도 알아. 그러니까, 기죽지 마.”
“응”
“믿어, 내 동생.”
“응...”
마지막으로 발을 옮기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에 막 돌아왔을 때만해도 낯설게 느껴졌던 역의 풍경이 다시 무척이나 낯익은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미즈타니를 찾았다. 지금쯤이면 회사에 있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찾게 되었다. 미즈타니니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거다. 물론, 그는 없었다.
교토에 돌아갈 때까지 나는 거의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보았던 것을 생각했다. 가족과, 미즈타니와, 유우를 생각했다. 미즈타니와 헤어지던 날을 회상했다. 그 날 받았던 우산을 생각했다.
도착하니 교토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구름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며 아침에 나에게 우산을 건네주었던 누나가 불쑥 기억났다. 그 우산을 펼쳐들었다. 미즈타니에게서 빌린 우산은 결국 돌려주지 못한 채, 여기까지 들고 와 버리고 말았다.
사이타마에 가기 전에 구해 둔 새 집으로 향했다. 그 곳은 앞으로 내가 혼자서 살아가야 할 새로운 공간이다. 아마 그 집에서 당분간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늘 불안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사이타마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배웅해 주던 누나와, 동생, 그리고 말없이 현관까지 가방을 들어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갔다.
“사카에구치 군, 집에는 잘 다녀왔어?”
“네, 덕분에 몸도 많이 괜찮아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큰 일 겪었지만, 다시 한 번 열심히 해 봅시다.”
“네.”
다시 돌아온 직장은 여전히 바빴다. 지금의 나에게는 차라리 일이 많은 편이 나았기에 나는 한 눈 팔지 않은 채 열중했다. 일이 다 끝나지 못하면 집까지 들고 와 잔업처리를 했다. 그런 일정 속에서도 끼니는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아침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밥을 먹었다. 누나가 잔뜩 챙겨 준 반찬을 먹지 않고 버리게 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그 덕분인지 나는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어딘지 충실한 기분을 맛볼 수가 있었다.
바쁜 회사 일은 당분간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바빠, 오늘은 생각 외로 일이 빨리 끝나서... 응, 저녁은 먹었어...하핫, 누나야말로, 응, 아버지한테도, 몸 챙기시라고, 전해 줘. ....걔는 알아서 하겠지. 어쨌든, 반찬은 알아서 만들어 먹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응. 응... 응.”
누나한테서 온 전화를 끊고 TV를 틀었다. 모처럼 일이 빨리 끝난 날이었으나 곧장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TV나 보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조금 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리 관심을 두고 싶은 것도 없었고, 당분간은 이대로 재미없는 독신 생활을 즐기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화면 속에서는 여기저기서 행해지는 축제의 모습이 담겨있다. 펑펑 터지는 불꽃과 그것에 감탄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이미 멀어진 사이타마의 하늘을 떠올리게 된다.
갑자기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망설임 없이 일어나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오고 있었다. 요 근래 비가 잦다. 여름이 물러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집안으로 들어가 우산을 들고 다시 나왔다. 근처 슈퍼에서 맥주를 사서 돌아왔다. 혼자서 홀짝이고 있는데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음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비가 오니 오늘 밤은 벌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조금 아쉽다.
여름의 막바지는 소란스럽다. 지나가는 비도 시끄럽게 떨어지고, 여름 벌레들도 쉬지 않고 울어댄다. 어디선가, 열심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울어대고 있다. 그것은 소음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축제라도 있는 밤이면 돌아오는 길도 적막하지가 않다. 끝나가는 여름은 요란하고 분주하다. 나는 이 소란스러움이 오히려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느낀다.
다 마신 맥주 캔을 처리하기 위해 일어섰다. 싱크대에 두고 돌아서는데 현관에 놓아 둔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미즈타니에게서 받은 우산이었다. 그 우산은 어느새 현관 구석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산을 타고 내려 온 빗방울이 바닥에 조그만 원을 만들고 있었다. 신문지를 가져와 우산 밑에 두었다. 이제는 신문지가 젖는다. 빗물이 서서히 신문지를 적시며 번져가는 모습을 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