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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시선이 지독히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짜증이 나는 일인지, 사람을 불안에 떨게 하는지, 너는 알고 있을까? 알고서 괴롭히는 것일까?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일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미하시는 나에게 있어선 소중한 투수이고, 니시우라 야구팀에 있어선 소중한 전력이고, 그래서 신경이 쓰였고, 나도 모르게 과한 친절을 베풀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베군이, 좋아."
고백을 받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지라 놀랐다.
받은 고백은 그 자리에서 거절하고, 거절이 죄라도 되는 양 사과도 했다. 미하시가 나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 번도 미하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미하시는 아무래도 다른 시선으로 나와 마주하고 있었던 것인지... 도대체 언제부터인지는 감도 잡히지가 않는다.
고백을 받은 후 며칠간은, 굉장히 신경이 쓰여서, 그걸로 됐던 걸까, 하고 걱정이 되어서, 하지만 더 뭘 어쩌겠어? 싶기도 해서, 반은 포기하고, 반은 계속 신경을 쓴 채, 설마 컨디션이 무너지는 일은 없겠지? 그런 뻔한 속마음까지 내비치며 그를 지켜보았다.
다행히도 미하시는 그 이후로는 나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연습에도 별 영향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대로 시간이 흘러 다시 우리의 사이가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깨닫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나를 끈질기게도 따라붙는 너의 시선을.
부담스럽긴 했지만, 아아, 네가 나에게 보였던 그 마음은 사실이었던 거구나. 싶어서 모르는 척 눈 감아주기로 했다.
아니, 사실 네가 나를 훔쳐보는 것은 네 자유이고, 그냥 이 정도로 끝나기만 한다면 못 견딜 것도 없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멀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를 향한 너의 시선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노골스럽게 변해갔다.
끈적하게 무게를 가지고 나에게 달라붙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네 시선에 반응하듯, 소름이 돋았다.
아아, 너의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 거구나.
그걸 깨달았을 땐, 그 진실이 무거운 추로 변해 순식간에 내 발목을 감아, 숨이 막히는 수면 저 아래로 끌어내리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네가 보내는 이 시선이, 거절에 대한 미움 때문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훨씬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너는 나랑 눈이 마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지만, 네 시선은 이미 내 살을 뚫고 들어와 썩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내 안에 파묻힌 너의 시선은, 너와 헤어져도, 집에 도착해서도, 잠을 잘 때도, 나를 따라다녔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곧 육체적인 피로로 이어졌다. 살이 마르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누가 봐도 병에 걸린 사람처럼 내 모습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꼭 내 안에 둥지를 튼 너의 시선이 나를 흡수하며 자라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너의 시선을 안고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아, 아베,군."
"......"
"...저,기.. 저,... 괜,찮아..?"
"......"
미하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에 오한이 들고 속이 울렁거려 입을 막았다.
항상 나를 향한 시선. 어디서든 나를 지켜보는 시선. 절대 떨어지지 않는, 너의 시선.
미하시가 조금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어 본다. 순간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째선지,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열, 열..있는 것 같은데,... 양,호실.."
"........미하시."
미하시는 내 목소리에 긴장한 듯 순간적으로 허리를 곧게 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여전히 시선만은 나를 향한 채, 왜? 하고 물었다.
"....아직도 나를 좋아해?"
너는 그 질문에 뺨을 붉게 물들였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
.
.
미하시,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해바라기가 줄을 서 있는 곳이 있어. 한창 피어 있을 때는 그 모습이 당당해서 보는 건 꽤 즐겁기도 했었어. 그런데 요즘은 날도 날이고 계절도 지나가고 있어서인지 해바라기가 시들어가는 거야. 이미 그 커다란 잎은 바짝 말라서 건드리면 부식한 쇳덩어리마냥 무너질 것 같은 무거운 갈색으로 물들었어. 너의 시선은, 꼭 그것 같아.
걱정이 된 친구들이 등을 떠밀어 어쩔 수 없이 양호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미하시가 동행해 주었다. 미하시는 내가 체력이 다해 비틀거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듯 부축이라도 해 줄 심산이었던 것 같지만, 나는 도저히 너와의 접촉을 허락할 수가 없었다.
"미하시, 난..."
"....?"
"나한테는, 무리야..."
"으,응. 알,아. 괜,찮아. 신경쓰지,마. 아베,군. 그냥, 나, 혼자, 멋대로, 좋,아하는, 거,니까.."
"...."
너는, 그렇게 구실 좋은 변명을 내세워, 나 혼자 좋아하는 거니까, 내버려두라는 식으로,
그러니까 네가 보내는 그 지독한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네 멋대로, 끝까지 네 편한 대로, 너의 방식으로.
"아,아베군, 정말,로 괜,찮,아..? 얼굴 색이 많이, 안,좋아.."
"....괜찮아."
너는 그렇게 서서히 나를 병들게 만들어.
미하시. 나는 너의 시선을 거부할 수가 없어.
너는, 그걸 알고 있잖아.
알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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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여자친구 있는 아베가 나옵니다.
(2008/08/29~2008/10/?)
(1)
1.
난 땀 냄새 나는 남자친구는 싫으니까.
마리코가 그 말과 함께 불쑥 내민 것은 작은 유리병에 들어 있는 향수였다. 사귀고 100일째 되는 날 향수 선물이라, 귀엽군. 하지만 그에 딸린 코멘트는 전혀 귀엽지 않아. 속으로 투덜거리며 받아들고 냄새를 슬쩍 맡아보았다.
"고마워"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마리코가 웃는다.
"왜?"
"전혀 고마워하는 표정이 아니잖아."
"...."
"뭐, 그건 됐고. 내일부터 꼭 사용하기야?"
"어..."
귀찮아.
그녀가 준 향수병을 조심스럽게 가방 속으로 쑤셔넣었다. 유니폼 사이에 끼워넣으면 적어도 깨질 일은 없겠지...
아베는 향수병을 대충 옷과 옷 사이에 둘러싸듯 쑤셔넣곤 그녀의 시선이 떠난 틈을 타서 킁킁거리며 자신의 몸을 탐색해 본다.
딱히 냄새가 난다는 것을 눈치 채긴 힘들었다. 일단 연습이 끝나고 나면 매일 샤워는 하고 있고 유니폼이야 어쨌든 교복은 깨끗하게 빨아 입고 다니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서 냄새가 난다는 걸까. 아니, 어쩌면 항상 땀에 쩔어 살아온 일상이니 자신은 잘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연습 꽤 빨리 끝났네?"
마리코는 눈앞에 놓여있는 콜라를 집어들어 한 모금 빨더니 시선을 올려다보듯 하며 그렇게 물었다.
"뭐, 3학년이기도 하고... 이제 슬슬 연습일도 줄어들고는 있어."
"흐응~"
"..기뻐?"
"에? 뭐가?"
"나 야구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에~이. 그렇지 않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응원 한 번 온 적 없는 여자친구를 본다.
응원은 커녕 야구의 룰도 모르는 마리코와 어쩌다 사귀게 된 것일까.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그냥 어쩌다 3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되었고, 어쩌다 고백을 받았으며, 어쩌다 사귀게 되었다. 평범한 패턴이었다. 여자친구를 사귄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았고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귀찮은 일, 이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단점이었지만 그렇다고 헤어질 정도로 귀찮은 일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3개월이 넘도록 계속 되어 온 교제였다.
가끔은 하나이에게서 (하나이하고는 3년 내내 같은 반이다. 지겹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도 있었다.
"마리코 하고는 대체 왜 사귀는 거야?"
대체, 왜, 라니. 아베는 이 질문에 과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곤란했다.
"뭐냐 그건. 대체, 왜, 라니?"
"아니 그도 그럴게... 넌 그다지 여자친구하고 어디 놀러 가는 걸 즐거워하는 타입도 아니고, 항상 입에다 귀찮아~ 를 달고 사니까. 그럴 거면 그냥 헤어지지 그러냐... 싶은 기분도 든달까..."
"헤어지는 건 더 귀찮잖아."
"..허어.. 그래. 그건 확실히 그럴 것 같지만."
".....?"
"넌 마리코의 어딘가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한군데 정도 있긴 한 거야?"
"...예쁘잖아?"
"..........."
그렇다. 일단, 마리코는 예뻤다. 피부가 타는 게 싫어서 남자친구 응원조차 오지 않는 그녀의 확고한 신념 아래 지켜진 하얀 피부는 깨끗하고 시원한 인상을 풍겼다. 약간 웨이브가 들어간 어깨를 넘는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적갈색 머리도, 같은 색을 진 눈동자도, 전체적으로 색소가 부족한 그녀는 팔다리가 긴 시원한 미인형이었다. 일단, 남들이 보기엔 부러워할 만한 여자친구. 솔직히 아베로썬 이 정도면 충분했다. 뭐가 충분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마리코 정도면, 뭐, 라고 생각하고 만다.
"그런데..."
"응?"
"어제 하굣길에 잠깐 연습하는 거 구경갔었는데..."
"헤에~ 네가 웬일로?"
"그냥 어쩌다 그 앞을 지나가게 됐는데, 친구가 근처에 야구부가 쓰는 그라운드가 있다고 알려줘서..."
"...야. 학교를 3년이나 다녔음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어쨌든~!"
"어쨌든, 뭐?"
"...나 오늘 처음 봤는데. 같이 연습하던 친구. 누구야?"
"응? 누구?"
"왜... 남자치곤 꽤 하얀 피부에.. 뭔가 혼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아, 미하시? 우리 투수."
"헤에.."
"왜?"
"아니 그냥..."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 시선을 슬쩍 흘리는 마리코의 표정을 보니 '그냥' 일리는 없다는 생각에 아베는 다시 한번 물었다.
"뭔데?"
"...아니 그냥, ...아베군 취향인가.. 싶어서."
".........뭐?"
무언가 지금 어이없는 한마디를 들은듯했지만 마리코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잠깐, 화장실...하고 일어나더니 멀어진다. 아베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진 채, 멀어지는 마리코의 등만 주시했다.
다음날, 아베는 마리코한테서 받은 향수를 약속대로 사용해본다. 하지만 그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아베가 향수를 뿌렸다는 것을 눈치 채진 못했다. 심지어 마리코 마저!! 땀 냄새 나는 남자친구는 싫다더니 사실은 후각에 둔한 거 아냐?! 속으로 씩씩대며 자기 몸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향기에 괜히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하다못해 마리코에게서 "향수 뿌리고 왔어?" 라는 질문이라도 받았으면 덜 속상했을 텐데 그 질문조차 없다. 내일부터는 절대 안 뿌려! 라고 또 한 번 속으로 씩씩대며 부실로 향했다.
부실로 들어서자마자 아베의 시선에 들어온 사람은 단 한 사람. 미하시였다. 미하시는 아베와 시선이 마주치자 허둥대며 눈동자로 아베의 주위만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아,아베군. 수,업 끝났...?"
"어.. 너희도 꽤 빨리 끝났네?"
"응, 우,리는 오늘 청소 없,으니까..."
"흐응..."
아베가 등을 구부려 티셔츠를 잡아 빼듯 벗어던지는 찰나 옆에서 꼼지락거리던 미하시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아,베군...혹시, 향수...?.."
"윽..."
아베는 절로 얼굴 전체로 퍼지는 열이 귀까지 타고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제기랄. 작게 혀를 차고 유니폼의 단추를 꿰찬다.
"...냄새 나?"
"어, 응..."
"...많이 나냐?"
"아,아니!"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아 채는 거야?"
"....미,미안."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미하시는 불쑥 그렇게 사과를 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역시나 유니폼의 단추를 바르게 채우곤 등을 돌려 부실을 빠져나간다. "머..먼저 나,가볼께.." 라고 작게 말하며.
미하시의 모기만 한 목소리가 사라지고 얼마 뒤 부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울려 퍼졌다. 아베는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발걸음을 옮겨 창문을 확 열어젖힌다. 그리곤 벗어둔 자신의 옷을 들고 와 부실 밖을 향해 탁, 탁, 힘을 주어 털어보았다.
"이젠 3학년들 연습도 얼마 안 남았구나! 다들 기분은 어때?"
모모에 감독의 시원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여름의 끝을 알리려는 듯 필사적으로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묻힐 정도다. 아베는, 그렇게까지 커다랗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구요...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다가 미하시와 눈이 마주쳤다. 타지마 옆에서 두 손을 앞가슴에 모으고 우물쭈물 대던 미하시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아... 부실에서 짜증 낸 것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사내자식이 저렇게 꽁해서야.. 졸업하고 나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려고. 쯧...
3년을 함께 했음에도 미하시는 전혀 자신에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1학년 때와 비교해보면 미하시는 다른 친구들과는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미즈타니 같은 경우엔 미하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항상 주변만 맴돌았음에도 이제는 가볍게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하나이는 미하시의 바보 같은 행동에 가볍게 뒤통수를 때리며 "그게 아니잖아" 라던가, "이 정도는 혼자서 할 줄도 알아야지.." 라며 충고를 던질 수도 있게 되었다. 미하시는 이제 친구들을 피해 가는 일 없이 가벼운 충고나 장난질에 가볍게 대응할 수 있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유독 그는 아베와의 거리를 좁히려 들지 않았다. 미하시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디를 보나 자기만 따돌리는 그의 행동에 아베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를 때가 있었다.
연습을 끝내고 벤치로 돌아가 잠시 숨을 돌리는데 벤치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깜박깜박 램프를 빛내며 울고 있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마리코" ....받기 싫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베는 무시하지 못한 채 핸드폰을 손에 든다.
아베와 마리코의 데이트 코스는 늘 학교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제한되어 있다. 마리코도 아베도 괜찮은 데이트 스포트를 찾아 일부러 걸음을 멀리 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성격이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오늘도 연습했어?"
"응. 왜? 땀 냄새 나냐?"
"...풋. 하여간 속 좁긴. 그 말을 아직도 담아두고 있어?"
".......그런게 아니라.."
"향수는?"
"....."
"...칫."
향수는 뿌려봤다가 아무도 눈치를 못 채기에 그만두기로 했어. 속으로 그렇게 돌려주고 눈앞에 놓인 콜라를 집어드는데, 마리코의 어깨너머로 낯익은 실루엣 덩어리 세 개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베!!!!!"
가장 먼저 달려든 덩어리는 타지마였다.
"뭐~야. 제일 먼저 달려나가더니 데이트였어? 응? 흐응~"
"왜 이래. 이러지 마."
어깨를 무리하게 끌어안고 손 끝으로 볼을 콕콕 찔러가며 장난을 걸어오는 타지마에게서 최대한 몸뚱아리를 멀리 해본다. 그 뒤를 따라 심술궂은 미소를 입꼬리에 걸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것은 이즈미였다.
"안녕하세요?"
아베가 타지마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이즈미는 잽싸게 마리코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이 녀석 여자친구 있다는 말은 하면서도 도통 누군지 가르쳐주려고는 하지 않아서요."
"네..."
"오늘 연습도 빨리 끝냈겠다. 궁금해서 녀석 뒤를 좀 밟았습니다."
"멋대로 미행하지 마!!!"
"시끄러. 타지마 그 녀석 입 좀 막아라."
"옷케이~"
"으욱. 읍으읍!!!"
이즈미는 어느새 마리코의 옆자리에 털썩 걸터앉은 채,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한다.
"미하시~ 여기. 여기."
마지막 실루엣이 그제야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온다. '미하시'라는 이름에 마리코의 고개도 실루엣을 향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헤에~.."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가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여기."
이즈미가 손끝으로 가리킨 것은 아베와 타지마의 옆자리. 이즈미의 맞은편 자리였다. 미하시는 순순히 그 자리에 가볍게 걸터앉을 뿐이다.
"저기.. 미하시..군?"
의외로 미하시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마리코였다. 상반신을 쭉 빼고 몸을 최대한 미하시를 향해 보인다. 미하시는 저도 모르게 도망갈 곳이 없음에도 뒤로 주춤하는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얘기 들었어. 투수라고... 굉장하다! 야구팀에선 투수가 제일 대단한 사람 아냐?!"
"으..에.. 아니..아니..예,요.."
"거어~짓말. 그치? 투수가 제일 대단한 사람이지?"
"그럼~ 투수가 제일 대단한 사람이지."
이즈미가 능숙하게 받아준다.
"있지~ 아베군은 야구부 얘기는 잘 안해주고... 나도 사실 야구 같은 거 잘 모르니까 한 번도 본 적은 없는데... 아베군은, 야구부에서 어때? 어떤 모습이야?"
마리코의 질문은 평범한 궁금증이었다.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내 남자는 어떤 모습을 가장하고 있을까. 자신은 그것을 알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니 그 정도는 알려달라. 라는 무언의 압박이 함께 하는 시선만 빼면, 매우 평범한 질문이었다.
마리코의 적극적인 태도에 이즈미는 잠시 궁리한다. 아베가 어떤 모습이냐니, 그런 거 한 번도 신경 써본 적 없으니까. 지금이랑 똑같아.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타지마도 아베의 입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으면서도 시선을 위로 올려 골똘히 생각해 보는듯 했다. 그에 비해 미하시는 마리코의 시선을 피해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베군은... 잘,챙겨주고, 상냥,하고, 그리고, 좋,은 사람..이,예요.."
마리코는 그 대답에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하시라는 애 원래 그래?"
"뭐가?"
타지마와 이즈미, 미하시가 퇴장하고도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테이블 가운데에는 마리코가 그들이 퇴장하고 나서 한 번 더 사 온 감자스틱이 산처럼 쌓여 있다. 마리코의 손과 입이 분주히 움직였다.
"뭐랄까... 대하기 힘들다고 할까?"
"아... 좀 그런 구석이 있지."
"투수라서?"
"투수하고 뭔 상관이야? 뭐... 투수인 애 중에 성격에 결함 있는 애들이 몇 명 있긴 하지만..."
순간 아베의 머릿속을 쏜살같이 스쳐가는 그림자가 있었지만 아베는 세차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그 그림자가 선명해지기 전에 얼른 지워버렸다.
"....재미없겠다."
"응?"
"걔랑 3년이나 배터리였단 소리잖아? 답답하지 않았어?"
재미없다. 답답하다. 미하시를 처음 봤을 때 자신도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그 말은, 특히 미하시를 평가하는 듯한 그 태도는, 어째서인지 기분이 나빴다.
"좋은 녀석이야."
나쁜 녀석이 아닌 것은 틀림 없으니까.
"....흐음"
"다 먹었으면 가자."
"에~?"
아직 테이블 한가운데엔 감자스틱이 남아 있었지만, 아베는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야구부 연습을 위해(라고는 말해도 이젠 정말 형식적인 얼굴 비추기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그라운드로 향하던 도중 아베는 벤치에 멀거니 앉아 있는 미하시를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서선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패스트푸드점에서 자신을 칭찬하던 미하시가 떠오른다.
'잘 챙겨주고. 상냥하고. 좋은 사람.'
미하시에게 자신은 그저 단순히 '무서운 사람' 혹은 '엄격한 사람' 정도의 이미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미하시 입에서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리라곤 상상치 못했다. 아니 어쩌면 여자친구 앞이라고 신경을 써 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이"
아베의 목소리에 미하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다 자신의 눈앞으로 떨어지는 물건을 허둥지둥 움켜잡았다. 캔커피가 두 손에 위치한다.
"커피 정도는 마실 수 있지?"
미하시는 특별한 대답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제는... 미안..."
"응?"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미하시는 평소엔 말이 없다가도 먼저 입을 열게 되면 늘 갑작스러운 화제를 입 밖으로 꺼내기 일쑤였다. 그만큼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 동안 분명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 결론이 입 밖으로 빠져나오면 듣는 사람은 갑작스러울 수 밖에 없다고, 하나이에게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제, 뒤 따,라가서... 여자친,구 많이 놀,랬.."
"아아 ...됐어. 그 녀석은 놀라고 어쩌고 하는 섬세한 신경도 아니니까."
"......"
"나야말로 미안."
"으,응?"
"어제 그.. '마리코'가 이상한 거 물어봤잖아. 곤란하지 않았어?"
"...않,았어."
"아, 그래?"
"....아베군,"
"응?"
"잘못 아,닌데 어째서 아베군,이 사과 하,는거야..?"
"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났을 뿐이었다. 어제 미하시가 사라지고 마리코가 입에 담았던 미하시를 평가하던 말이. 그 순간이 떠오르면서 그냥 이유없이 사과가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베는 살짝 콧등을 긁고 조금은 쑥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뭐.. 내 여자친구 일이니까?"
순간, 아베의 눈엔 미하시가 숨을 멈추는 것처럼 보였다.
"어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살며시 쥐자 미하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고개를 숙인다.
"아베군, 여자친,구..."
"응?"
"미,인..."
"...그래?"
"응. 우힛..."
작은 웃음소리에 그제야 아베는 미하시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걘 미인인 거 빼면 장점은 요만큼도 없어."
"....나도,"
"응?"
"여자친,구... 생겼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며 미하시는 숙여진 고개를 다시 들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베에게서 받은 캔커피는 손에 꼭 쥐고 있을 뿐, 입에 대지는 않는다.
(2)
2.
여름의 마지막 시합이 끝나고 의무적으로 얼굴만 비추던 3학년들의 발걸음도 드디어 불필요해 졌다. 후배들의 배웅과 함께 3학년들의 정식 은퇴식도 어느새 끝이 나 있었다. 3년간의 니시우라 고교 야구부 역사를 쌓았던 그들의 모습은 이제 더는 그라운드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은 1,2학년들의 배경에 녹아드는 기합소리와 함께 펜스 너머를 흘깃거리다 사라지는 선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있어도 애써 운동장 안까지 들어와 그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선배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2 그라운드는 은퇴식을 마친 3학년들에겐 마치 더 이상은 발을 들일 수 없는 신성한 공간과도 같이 느껴졌으며, 반대로 그들의 출입을 막는 커다란 벽이 놓인 것처럼도 느껴졌다.
야구부에 갈 일이 없으니 긴 시간 함께 몸을 부대끼던 사이였음에도 애써 만나게 되는 일도 뜸해졌다. 이동수업이 있을 경우라던가 체육 시간이라던가, 복도나 운동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없으면 굳이 서로의 클래스까지 이동해가며 수다를 떠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같은 클래스를 유지하고 있는 하나이와 아베, 그리고 미하시와 타지마, 이즈미 정도가 꾸준히 얼굴을 맞대는 사이였을 뿐이다.
가끔 타지마는 반이 엇갈려 버린 미즈타니나 하마다를 찾아가 수다를 떨다가 돌아올 때도 있었다. 이것은 미즈타니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야구부 멤버가 눈에 보이면 일부러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달려가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지마를 뺀 다른 멤버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같은 클래스가 아닌 이상은 멀리서 발견하게 되어도 왠지 일부러 말을 거는 것도 어색해서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미묘하게 느껴지는 거리에 섭섭함보다는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아무도 그 감정을 표 내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게 느끼며, 그 사실에 익숙해져 갈 뿐이었다.
아베는 어정쩡하게 변해버린 모두와의 관계가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변해간다는 것에 대한 쓸쓸함이라던가 섭섭함 보다도 이것밖에 되지 않음에 괜히 초조해져 화가 났다. 그렇다고 자기가 먼저 다른 친구들에게 접근하는 스타일도 아니니 그 누구에게도 불만을 털어놓을 순 없었다. 결국 자신도 다를 것 없었기 때문이다. 게 중에서도 특히 아베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미하시였다. 미하시는 예상했던 대로 야구부원으로써가 아니고서는 아베를 찾아오는 일은 절대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눈동자가 자신과 주변을 훑다가도 금세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가기도 했다. 자신을 지나칠 때면 조그만 목소리로 '안,녕..' 하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릴 듯 말듯도 했다. 아베는 그런 미하시의 조그만 등을 보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진 않았다.
"심심하지 않아?"
언제나 그렇듯 패스트푸드점에서 마리코와 마주앉아 있는데 그녀가 불쑥 그렇게 물었다.
패드푸드점의 창 너머로 여름의 눈 부신 햇살이 사라진 것도 오래전 일이다. 부쩍 추워진 기운에서 이젠 가을도 다 가고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잡고 있는 수험 참고서만 보더라도 계절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충분한 계기가 되기는 했다.
"뭐가?"
아베는 넋을 놓고 있다가 마리코의 그 한마디에 그녀를 보지 않고 샤프펜슬만 고쳐잡은 채 눈앞에 놓인 수학참고서 문제에 정신을 집중했다. 마리코 역시 영어 참고서를 펼쳐 놓았지만, 앞에 놓인 감자스틱에만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항상 야구 야구 노래를 불렀으면서 최근엔 전혀 그런 소리 없으니까.."
"뭐, 일단 눈앞에 닥친 시험이 더 걱정이니까..."
"흐응.. 하나이가 그러던데.."
"응?"
"야구부 애들하곤 최근 제대로 연락할 일도 없다면서?"
"그야.. 뭐 다들 한창 바쁠 시기 아니냐..."
"그래두, 이상해.. 원래 그런 거야? 나는 중학교 때 친구하고 아직도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데..."
"....글쎄"
아베는 중학교 시절 함께 했던 선후배들과의 연락도 완벽하게 끊어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지금이랑 비교해보면 그다지 살갑게 지내온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료의식에 젖어 한때는 감정을 공유했던 사람들이다. 역시, 눈에서 멀어지면 무시할 수 없는 거리감이 피부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원래 그런 걸지도."
한참을 잡고 있던 수학문제의 답을 깔끔하게 적으며 아베는 그렇게 대답했다. 대답하는 순간, 머릿속 한가운데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어째서 미하시인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상의 두께도 많이 두꺼워졌다는 것을 외투를 여미며 생각했다. 오랜만에 새벽공기를 마시며 등교를 하고 있자니 이미 오래돼서 빛바랜 영상같이 흘러가는 한 단편적인 기억이 머릿속 구석진 곳을 슬금슬금 간지럽게 한다. 지금 이 시간쯤이면 야구부 후배들이 한창 운동장을 돌고 있을 시간이었다. 살짝 구경이라도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춥기도 하고 발걸음을 애써 돌리는 것도 귀찮아서 일단은 계속 걷는다.
그렇게 조금 걷다 보니 푸르스름한 새벽 등굣길을 걷고 있는 다른 친구들의 모습이 듬성듬성 시야에 들어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잔뜩 웅크린 동그란 등이 시야에 잡힌다.
"너, 참 오랜만이다."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서 속삭이듯 말했더니 잔뜩 웅크리고 있던 고개가 팟! 하고 올라온다. 많이 놀란 두 눈동자가 아베를 향했다. 어스름한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귓가에 대고 속삭였으니 분명 놀랄 만도 했다.
"아,베,,군..이다.."
"...."
"아,안녕..."
"......"
굉장히,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습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 아니었음에도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왜 불러세웠을까? 하고 싶은 말 같은 거 없는데. 해야 하는 말 같은 것도 없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아베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뒤통수를 긁적이고 똑같은 말을 또 한 번 반복했다.
"오랜만이야..."
"아,베군 대학 공,부 하고 있다,고..."
"응. 넌? 너도 대학 가지?"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시간은 듬뿍 남아있었다. 아베는 미하시에게 따뜻한 캔커피를 하나 들려주고, 결국은 후배들의 아침 연습을 훔쳐보게 되었다. 아베는 언젠가 이 비슷한 상황의 그림이 머릿속에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하시는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후배들의 구령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옆으로 젓는다.
"아,니. 난 대학 안,가.."
"...그래?"
공부 싫어하니까, ...뭐, 못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미하시가 대학에 안 가는 이유를 멋대로 납득해버리고 굳이 그 이유는 묻지 않은 채 아베는 시선을 돌렸다. 후배들을 보면서, 우리도 저 운동장을 달리고 있을 때는 저렇게 진지한 시선으로 필사적인 목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을까? 싶은 상념에 젖는다.
"아,베군, 혹,시..?"
"응?"
"..지,금은 향수 안,뿌려..?"
무척이나 오래된 이야기를 마치 최근에 있었던 일처럼 말하니 아베는 금세 이해하기가 힘들어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가, 곧, '아... 그때, 그거?' 하고 깨닫는다.
"응. 그날 이후로 안 뿌려봤어. 너한테 들키고 나서 말이지."
"미,미안..!"
"아? 아니아니. 원래 싫어해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응."
"왜?"
미하시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술을 축이고 대답했다.
"아베군,하고 똑,같은 향수 쓰는 친,구가 있,는데..."
"헤에, 그래? 너희 반?"
"응"
"그런데?"
"...자,꾸 아,베군 하고 겹,쳐보여,서... 이상,하지..?"
"이상한가?"
"...응. 향수,라는거. 이상,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것보다 너 잘도 그 향기를 기억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있잖,아. 예,를 들면. 전,혀 다른 사람,인데. 같은 향,기가 나면, 분명, 평소엔 잊,고 지내는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금세 떠,올라.. 치..치사,해.."
"그런가?"
"응.."
"...그래..?"
아베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미하시의 말이 맞는지 틀린 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녀석답지 않게 긴 이야기를, 녀석답지 않게 먼저 리드해가며, 녀석답지 않게 '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이, 꼭 이번이 처음인 것만 같아서 괜히 그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왜 기쁜 걸까? 잠시 생각하다가도, 뭐 아무렴 어때? 라는 결론을 짓곤,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미하시는 '치사해'라는 결론을 낸 뒤로는 딱히 특별한 말 없이 다시 입을 꼭 다문 채 제2 그라운드를 한참을 응시했다.
그리고, 또 한 번 미하시는 미하시 답지 않게 먼저 아베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곧, 있으면 시험,이지..?"
"응. 덕분에 죽을 것 같다."
"...여,자친구 아직, 계속.."
"아아.. 꽤 길지? 앞으로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아, 넌?"
"......"
"뭐 어때. 어차피 곧 있으면 졸업하는데 뭐."
".....졸,업.."
"응?"
"시험, 끝나면, 곧, 졸업,이구나.."
"응. 빨리 다 끝내버리고 속 시원하게 졸업해버리고 싶다."
".......그러,네.."
미하시와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하나이.. 이것봐라. 내가 너를 위해 합격 기원 부적을 만들어 왔어."
미즈타니가 심심했는지 하나이와 아베 반까지 놀러 와 공책 한 귀퉁이를 찢어 만든 것이 역력한 가로 선이 그어져 있는 '합격기원' 부적을 하나이의 이마에 들이댄다.
"이마에 붙이고 공부 해. 꼭 합격할 수 있을 거야..."
심심해서 떠드는 거겠거니. 하나이는 묵묵히 무시한 채 영어단어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베는 옆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쯧 혀를 한번 차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풀다 만 참고서를 꺼내 든다. 요즘은 항상 이런 식이다. 손에서 참고서니 단어장이니 떠날 일이 없다. 마리코와의 메일교환도 뚝 줄었다. 마리코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수험생이 다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눈코 뜰 새 없는 이 상황이 점점 벌어져만 가는 거리감의 이유가 되어준다고 생각했다. 분명, 시험이 끝나면, 상황이 조금쯤은 바뀔지도 모른다. 코빼기도 보기 어려운 사카에구치나 스야마도 언젠가는 복도에서 마주칠 일이 졸업하기 전에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아베는 열심히 샤프를 움직여 수학문제를 풀었다. 후회 없는 결과를 위하여. 그러다 문득, 대학에 가지 않는다던 미하시는 졸업 후 무엇을 목표로 하는 걸까. 하고, 뒤늦은 의문을 갖는다.
한창 수험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그 허리를 끊어버리는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이 애매한 시기에 방학이라니, 공부에 매진하겠다는 아베의 의지는 방학이라는 이름 앞에선 어쩔 수가 없다는 듯 방학 시작과 함께 집에만 틀어박힌 채 그동안 지쳐 있던 심신을 잠으로 보충해 나갔다. 그렇게 꼼짝없이 며칠 뒹굴거리다 아베가 집 밖으로 발걸음을 한 것은 딱 방학이 시작되고 일주일째 되는 날, 마리코의 전화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였다.
"어떻게 인간이 일주일간 메일 한통 없을 수 있냐?!!!"
마리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리코 특유의 고음의 목소리가 인정사정없이 안면을 때렸다.
"....오랜만이다."
"자다가 나왔지? 적어도 뒷머리는 좀 빗고 나오지 그랬어."
"........."
"감자튀김은 이제 질리지 않냐?"
"무슨 소리야 질리지 않으니까 감자튀김인거라구."
무슨 논리야...
아베는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눈앞의 감자튀김을 한번, 마리코를 한번, 훑는다.
"아!"
마리코가 갑자기 손뼉을 딱! 치더니 말했다.
"나 얼마 전에 미하시군 봤어!"
"..헤에."
"있지 웬 여자애랑 같이 있던데. 여자친구인가?"
"그래? 어떤 여잔데?"
"음.. 곱슬 머리에, 뭐, 귀엽게 생긴 여자애였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 그래."
"미하시군도 나 알아보더니 인사하더라?"
"흐응"
"그리고 또 한 번 인사하더니 그냥 가버렸어"
"응"
"쇼핑이라도 한 건지 둘이서 짐가방 커다란 걸 낑낑거리며 안고 가던데 대체 뭘 그렇게 잔뜩 산 걸까?"
"내가 아냐."
"...관심없어?"
"있어."
"흐응.."
"....너 말이야. 가끔 나하고 미하시 관련 시켜서 뭔가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 같은데."
"영화 보러 안 갈래?"
말을 뚝 끊어버리고 지금까지의 대화하곤 전혀 상관없는 주제를 꺼내 든 마리코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아베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이 머리로 어딜 가."
"물 좀 발라."
"집에 가서 공부나 해."
".....야구 영환데"
마리코가 지갑에서 영화표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아베가 대답한다.
"상영 시간은?"
어두컴컴한 공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게다가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타인을 신경 쓰며, 잔뜩 주의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관에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 울고 웃고 하는 것은 왠지 바보라도 된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런 아베였기에 영화관을 찾은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요즘은 광고를 많이 하는구나..."
"그만큼 대중적이 됐다는 거야. 너도 문화생활도 좀 즐겨가며 살어. 맨날 야구장만 찾지 말고."
"냅둬."
"대학가서도 야구 할거야?"
"...하지는 않을 거지만."
"야구 오타쿠는 못 끊겠다 이거지."
"너 진짜..."
한마디 쏘아주려고 하는데 갑자기 단조로운 음이 울리더니 영화 창엔 영화관람을 위한 기본예절에 관한 광고와 곧 영화가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이 떠올랐다. 주변은 금세 조용해진다. 브라운관에 적혀있는 광고 글대로 핸드폰 전원을 끄기 위해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 동시에 핸드폰이 울었다. 아베는 깜짝 놀라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꺼내 들고, 이름을 확인하고, 아베는 핸드폰을 금세 꺼버릴 수도, 그렇다고 받아버릴 수도 없는 어정쩡한 기분으로 망설이다가 마리코에게서 따끔한 시선을 받는다.
뭐, 급한 일이면 또 걸겠지.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아베는 손아귀에서 깜박깜박 빛을 발하며 우는 '미하시'의 이름을 무시한 채 끊어버렸다. 아베는 영화가 중반을 달리고 있을 때쯤에서야, '미하시'에게서 먼저 전화가 온 것은 3년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3) END
3.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겨울 방학을 끝내고 개학 첫 등교일, 어째서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같은 반도 아닌 미즈타니의 얼굴부터 마주쳐야 하는지 잠시 불평을 뱉어내고, 아베는 터벅터벅 걸어와 변하지 않는 창가 다섯 번째 자리 책상에 가방을 털썩 던져두었다. 매점에 들려 가볍게 먹을만한 간식거리를 사려고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데 미즈타니가 아베의 등을 덥석 붙잡는다.
"너도 미하시한테서 전화 왔었지?"
다짜고짜 나온 이름에 아베는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아아 그 전화.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덧붙여, '마리코랑 영화 볼 때 걸려와서 받진 못했지만' 하고 말 하려는데 미즈타니가 먼저 선수를 치듯 이어 말했다.
"나 그 전화 받고 정말 깜짝 놀랐다고. 하나이도 놀랬대."
"당연하잖아... 안 놀라는 게 이상한 거라고."
무엇에 놀랐다는 것일까. 기본적인 궁금증이었다.
영화가 다 끝날 때까지 두 번은 걸려오지 않았던 '미하시'에게서의 전화가 신경이 쓰였지만 하루가 지나자 그 기억은 금세 아베의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그냥 별일 아니겠지. 어쩌면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잘못 걸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제멋대로 타인의 사정을 납득해 버리는 것은 자신의 나쁜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인지 미하시에 한해서는 직접 확인해 보는 것보단 혼자서 납득해버리는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학교에서 얼굴 보게 되면, 그때 물어봐도 늦지 않아. 그것이 아베가 낸 결론이었다.
"그래도 난 전화해줘서 좀 고맙긴 하더라. 미하시한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입을 통해서 그런 소식 들었으면 정말 섭섭했을 거야..."
"뭐.. 수험도 안 친다. 야구도 안 한다. 사실 난 어느 정도 이쪽 가능성도 생각은 하고 있었어."
"우오! 역시 캡틴!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니까!"
"..언제적 캡틴이냐.."
미즈타니와 하나이의 대화는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베로써는 도저히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무엇이 섭섭하고 무엇의 가능성이란 말일까. 미하시의 전화 한 통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던 걸까.
"저기..."
"응?"
"...너네들 지금 무슨 얘기 하고 있는 거야?"
"....응?"
"미하시가 어떻게 됐어?"
".......에?"
하여간, 끝까지 이기적인 새끼.
자기 중심에 타인을 위한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제멋대로인 새끼.
아베의 발걸음에는 분노가 어려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열기에 절로 아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학생들이 양옆으로 갈리어 그의 걸음을 막아서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3학년 9반의 교실 문을 세게 열어젖히고 크게 이름을 불렀다.
"미하시!!!"
한 반을 가득 메우고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책상을 떠나 아베에게 집중한다.
"미하시 없어?!!"
잔뜩 화가 난 목소리. 점점 일그러지는 표정. 절로 꽉 쥐어지는 주먹으로 교실 문을 후려쳤다.
"....없냐고, 젠장."
목소리가 꼭 우는 것처럼 잠겨있어 학생들의 시선은 더더욱 떠날 줄을 몰랐다. 그 시선 속엔 타지마가 있었고 이즈미도 있었다. 곧 두 사람이 걸어 나오더니 아베를 교실 밖으로 끌어낸다.
"왜 그래? 너."
이즈미가 물었다.
"미하시 이사 갔잖아."
타지마가 대답했다.
"........"
아베는 침묵했다.
아베는 점심시간 내내 그라운드의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들고, 발신자 기록 명단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미하시의 이름을 확인하고 신경질적으로 주머니 속으로 되돌려 놓았다.
여름엔 항상 매미 소리나 운동장에 나와 있는 학생들의 이야기 소리가 시끄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임에도 겨울이라 그런지 위화감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아베 또한 침묵했다. 가끔 한 번씩 발로 땅을 차내는 소리만 빼면 고요하고 쓸쓸한 공간이었다.
안 그래도 머릿속엔 수학 공식과 영어 단어가 복잡할 만큼 꽉 들어차 있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사람 마음은 심란하게 헤집어놓고, 자기만 달랑 외국으로 내빼버린 미하시를, 아베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더럽게도 이기적인 새끼야. 넌."
"미하시군, 학교 그만뒀다며? 외국으로 갔다던데, 뭐야? 왜 간 거야?"
방과 후, 데이트코스에서 마리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
"하나이가 말해줬어."
"네 정보원은 하나이냐."
"....연락 안 왔었어?"
"왔었어."
"언제?"
"영화 볼 때."
"...아."
마리코는 이번에도 눈앞에 쌓여 있는 감자스틱을 하나 집어들었다가 먹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다시 살그머니 내려놓곤 대신 콜라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입에 대지는 않은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미하시군한테 사과 할 일 있는데..."
"뭐?"
"왜, 그때 있잖아. 답답할 것 같다고, 미하시군 없는 자리에서 나쁜 소리 했었잖아."
".....답답한건 사실이니까 굳이 사과할 필욘 없어."
"....."
"...답답하고, 질리는 녀석이야. 그 녀석은."
"괜찮아?"
"뭐가?"
"....아베군, 미하시군한테 신경 많이 썼었잖아. 기분, 괜찮냐고..."
어째서인지 잔뜩 겁먹은 눈동자로 마리코가 그렇게 물었다. 아베는 그 눈동자를 보니 왠지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에 어금니를 꽉 깨물곤 고개를 숙였다. 불안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코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누군가가 떠올랐다.
"왜, 자꾸 그 녀석 얘길 하는 거야."
"...그야..."
"너, 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데?"
"......."
"안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잔뜩 뭉쳐있는 감정이 목소리에 실린 채 새어 나왔다.
"...그 바보 같은 영화를 보면서 바보처럼 웃고 있을 때 그 녀석은 분명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잔뜩 불안해하며 혹시 미움받은 건 아닐까, 혹시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오해를 하면서 결국은 또 한 번 전화를 걸지 못한 채 그냥 떠나버렸어. 어떻게 아느냐고? 별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야. 그 녀석이랑 3년을 같이했어. 아무리 불안한 시합도 그 녀석이 마운드 위에 서주기만 하면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고.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투수였어. 그러니까 아는 거야. ....싫어하진 않았어. 착한 녀석이었으니까. 잘해주고 싶었고, 그랬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둔한 새끼는 끝까지 내 주변만 맴돌면서 시선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항상 주변만 훑어대고, 끝까지, 끝까지, 내 안색만 살피다가 그렇게 떠나버렸어. 끝까지 말이야. 3년을 함께 했는데 그 녀석은 처음 봤을 때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나 똑같았어. 다른 녀석들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좁혀져 가는 거리도 나하고는 절대 좁혀지지 않았어. ...그게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그래도 언젠간 나도 다른 녀석들처럼 그 녀석이 인정한 그 녀석의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어. 그런데 결국은 이 꼴이야. 또 나야. 또 '나만' 이라고!"
사실 아베는 생각했었다. 급한 일이라면 분명 또다시 걸어올 거라고. 어쩌면 자신도 두 번째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첫 번째 전화를 일부러 무시했을까?
만약 걸려왔더라면 영화를 보는 도중이었다고 해도 전화를 받고자 자리에서 일어섰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은 허세였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그냥 떠나버릴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화가 났다. 자신이 생각했던 거리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던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것이 일종의 배신감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끝까지, 나만, 인걸까.
그 후, 콜라 속의 얼음이 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침묵했다. 시간이 지나 눅눅해진 감자스틱을 마리코가 한 개 들어 입속에 넣었다. 쌓여 있는 감자스틱을 다 먹어 없애고 나서야 마리코가 한마디 한다.
"아베군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전혀 상냥하지도 나를 잘 챙겨주는 성격도 아니었어."
마리코의 그 한마디에 아베도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알고 있어. 그 정돈."
"그래서 질투가 났었어."
"...."
"그러니까 사과가 하고 싶었어."
머릿속 한구석에 미하시를 쑤셔넣고 아베의 수험공부는 계속 되었다. 미하시가 이민을 가든 소풍을 가든 시험 날짜가 늦춰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는 거고, 시간이 지나면 멀어진 거리만큼 기억 속에서도 사라질 것이다. 이 찜찜한 기분이. 이 더러운 기분이. 조금씩 몸속으로 스며들어 거북하게 부대끼다가 그것마저 느낄 수 없게 되는 날은 분명히 찾아온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멋대로 정리 당한 미하시와의 관계를 구석진 곳으로 꾸깃꾸깃 접어 넣었다. 안으로 밀어넣으면 밀어넣을수록 울퉁불퉁 접혀버린 그것의 모서리가 쿡쿡 고통스럽게 찔러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억지로, 밀어넣었다.
멀어진 것은 미하시만이 아니었다. 마리코와도 멀어지는 거리를 느꼈다. 그것이 아베쪽에서 멀어지는 걸음인지 그녀 쪽에서 멀어지는 걸음인지는 인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것을 신경 쓸만한 여유 또한 이미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만 남겨두고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까워지는 것은 시험날짜뿐이었다.
수개월을 준비해 온 시험임에도 시험은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처럼 지나갔다. 아베는 잔뜩 긴장한 채 인생에 한 번뿐이었으면 하는 시험을 탈 없이 무사히 치렀다. 그만큼 공부를 해왔으니 시험이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것이 노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레벨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유독 아베에게만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수개월의 노력이 반나절로 끝이 났다. 수험장을 빠져나오며 느낀 감정은 허탈함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삼일이 지났다. 해방감을 만끽하며 우유를 사려고 매점을 향한 아베의 발걸음이 낯익지만 오랜만인 한 뒤통수를 보고 우뚝 멈췄다. 아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곤 그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사카에구치. 우리 계속 같은 학교였던 것 맞냐? 어떻게 그동안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드냐?"
"하핫. 나야 둘째치고 너야말로 연애와 공부를 오가느라 주변 살펴보기가 힘들었던 거 아냐?"
"아냐 인마."
"시험은 어땠어?"
"뭐, 그럭저럭"
"헤에. 그럼 이제 본고사만 잘 보면 되겠네?"
"...넌 꼭 이제 막 해방의 기분에 휩싸인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찬물을 붓고 싶냐?"
사카에구치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미하시는 야구부 멤버들 사이에서도 특히나 사카에구치를 잘 따랐다. 미하시가 사카에구치를 따르는 것은 타지마나 이즈미와의 각별한 사이하고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사카에구치 역시 미하시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똑같이 미하시의 변화를 눈치 채도 말없이 묵묵히 지켜만 보는 아베와는 달리 사카에구치는 상냥하고도 따뜻하게 미하시의 조언자가 되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아베는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 좋게 웃는 사카에구치를 보며 어쩌면 이 녀석이라면 미하시의 말 못할 고민이나 비밀 이야기도 알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미하시의 비밀이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사카에구치는 자신에게 느껴지는 아베의 시선을 느꼈는지 웃음을 지우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애들 보러 갈래?"
사카에구치의 '애들'은 겨울임에도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니시우라 야구부의 후배들이었다. 두 사람은 펜스 너머에서 후배들의 열기를 흐트러트리지 않으려고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아베."
"응"
"미하시 보고 싶다. 그치?"
아베는 사카에구치의 그 물음에 빠르게 대답하지 못했다. 후배들을 향한 시선이 잠시 멀어지더니 펜스 그물망을 쥐고 있던 손이 그물망을 꼭 쥐며 오그라들었다. 아베는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을 한다.
"...응."
아베의 눈에는 잔뜩 흙이 묻어있는 더러운 후배들의 유니폼이 참으로도 부럽게만 보였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과열된 몸뚱어리가, 퀴퀴한 땀 냄새가 그립게 느껴졌다.
"미하시 하고는..."
아베가 말했다.
"미하시 하고는... 저 옷을 입고 있었을 때만 친구였다는 느낌이 들어."
"...그런 말 하지 마. 미하시는 너를 누구보다 좋아했고, 누구보다 존경했어."
"네가 어떻게 알아?"
"알아."
사카에구치가 말했다.
"전화로 '아베군하고 통화하지 못했어...'라고 말하던 미하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으니까."
겨울이었다. 아베는 추위에 어깨를 움츠렸다.
본고사까지 무사히 치르니 졸업식은 눈 깜짝할 새였다. 아베는 두 번째 단추를 마리코에게 건네고 마리코는 등을 돌렸다.
아베는 식을 끝내고 곧장 부실로 향했다. 후배들한테서 역시나 축하인사를 들었다. 무엇하나 좋을 건 없는데 무사히 졸업한 것에 대한 축하인사였다. 그중 한 후배는 아베에게 미하시의 근황을 물었다. 미하시 선배는 건강히 잘 계시겠죠? 하고. 아베는 녀석이 귀여워서 앞머리를 헝클어트리듯 부벼주었다. 그리곤 대답했다.
"나도 몰라."
부실은 이미 후배들의 차지였으니 아베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오늘은 모모캉이 졸업식 축하파티를 열어준다고 했다. 오랜만에 니시우라 초대 멤버가 한 곳에 모이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선가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베는 걸음을 쉬지 않고 움직이다가 결국은 위로 향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옥상 문을 앞에 두고 멀뚱히 서 있었다. 3년 내내 한 번도 올라와 본 적이 없는 공간이었다. 출입금지로 막혀있었지만 이미 졸업한 몸. 학교 규칙 따위 무섭지 않다. 아베는 옥상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운동장은 좁았다. 한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왔다. 신기했다. 군데군데 아는 얼굴들도 보였다. 그 속에서 스야마를 발견했다. 머리가 자라 있었다. 아베는 그 모습을 보곤 큭큭거렸다.
"미하시네 아버님이 회사 일로 외국으로 나가셔야 했나 보더라고..."
후배들과 멤버들에게 휩싸인 파티자리에서 아이들은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열심히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시험은 잘 보았냐. 어느 대학에 가느냐. 졸업해도 연락하면서 지내자. 등등. 할 말은 많았다. 그중에서 유독 말수가 적은 아베 옆으로 이즈미가 다가왔다. 그리곤 자연히 그들의 입에는 미하시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이즈미는 침착한 목소리로 아베에게 미하시의 사정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물론 미하시까지 따라나설 필요는 없었지만. 자기가 같이 가겠다고 했나 봐. 그 녀석 어릴 때부터 좀 복잡했잖아. 더 이상은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건 싫다고. 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어린애도 아닌데 굳이 따라나서야 했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남의 집 가정사니까 말이지.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즈미는 말끝을 흐리며 눈앞에 놓인 음료수를 마셨다.
"....그래."
아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근데 아베..."
"응?"
"여자친구 하곤 헤어졌다며?"
"누가 그래"
"하나이가."
"하여간 저 자식은..."
아베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래로 향한 시선 속으로 단추를 잃은 공간에 툭 튀어나온 실밥이 보였다.
마리코는 아베의 이별선언에 긴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두 번째 단추는 나 줘.' 그렇게 말하고 두 번째 단추를 강탈해 갔을 뿐이다.
"응.."
"왜 헤어졌어?"
"몰라. 그냥."
"...."
"그냥.."
"흠.."
주변을 살폈다. 힐끔거리며 타지마 옆에 붙어서 다른 멤버들의 이야기에 조심스럽게 반응하고 있었을 미하시가 저절로 눈에 그려졌다. 분명 함께 졸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쓸쓸한 기분은 아베보다는 미하시가 훨씬 더 컸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구석에 꼬깃꼬깃 접어 두었던 '미하시'가 가슴을 쿡쿡 찔렀다.
"이즈미"
"응?"
"내가 미하시를 대할 때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었냐?"
"넌 특별했다기보단 특이했지만 말이야. 미하시하고 있을 땐 더 특이했었지."
"........."
"왜?"
"....딱 한번, 마리코가 야구부 연습을 구경했던 적이 있었는데"
"흠"
"그때 내가, 미하시하고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나 봐. 아니, 분명 '대화'는 아니었겠지만."
"그런데?"
"그런데, 그때의 미하시를 향한 내 시선이 굉장히 '상냥했었다'고..."
"헤에.."
"그 모습을 본 마리코는..."
"..음."
"....닭살이 돋았다고."
"푸핫!"
갑자기 폭소를 터트리는 이즈미를 보며, 아베도 갑자기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막을 수가 없어 함께 웃었다. 짝을 지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친구들이 두 사람의 반응에 깜짝 놀라 쳐다보더니 곧 무슨 일인가 싶어 아베와 이즈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베는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주변을 살폈다. 만나기 어려웠던 친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낯익은 표정으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속에 미하시만 없었다.
파티는 생각보다 오래도록 이어져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완벽한 밤이었다. 아베는 교복을 벗어 책상 의자에 단정히 걸쳐두었다. 고교 입학 후 새로 맞춘 새까만 교복이었다. 니시우라 고교는 굳이 교복이 필요 없었지만 아베는 일일이 사복을 골라 입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어 교복을 맞춰 입었다. 교복을 보고 있으니 자신이 학생이었던 시절이 두드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은 입어야 할 일이 없는 옷. 그것이 교복이었다.
책상에 가득 들어차 있던 참고서와 교과서도 꺼냈다. 상자 하나를 들고 와 그곳으로 옮긴다. 필기 노트는 버릴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은 함께 정리해 놓기로 했다. 교과서와 노트, 참고서만으로 상자 하나가 금세 꽉 찬다. 야구에만 혼을 팔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도 꽤 공부에 열심히였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학교에서 받아온 졸업 증서와, 졸업식 앨범을 꺼내 보았다. 졸업증서는 분명 두 번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마찬가지로 상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졸업 앨범은 고민하다가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곤 잠시 생각하다가 앨범을 다시 손에 들었다.
넘겨보니 군데군데 아는 얼굴이 찍혀 있었다. 물론 미하시도 있었다. 그 녀석 졸업 앨범은 갖고 떠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가지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미하시에게 있어 '친구'는 특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녀석의 주소만 알게 되면 자신의 것을 대신 보내주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미하시를 향한 아베의 분노는 이미 진정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렇게 화를 낼 만한 일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미하시는 자신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노력했었다. 그것을 무시했던 것은 자신이다. 생각해보면 그때 화가 났던 것도 미하시를 향한 화였다기 보단 자기 자신을 향한 화에 더 가까웠다. 미하시를 탓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것을 깨달았다. 바보 같은 건 자신이었다.
'나만'이 아니라 '내가' 미하시에게 접근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미하시의 공간에 쉽사리 발을 들일 수 없었던 것처럼, 미하시 역시 아베의 공간에 쉽사리 들어올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았다. 억지로 끌어당겼으면, 분명 저항 없이 끌려왔을 녀석이었을 텐데. 어째서 자신은 그것을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일부러 외면했던 것일까. ...지금에 와서 깨달아 봐야, 어차피 지난 일이다.
짐 정리를 하다 보니 어딘가 구석에 박혀 있었던 듯한 마리코에게서 받았던 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베는 그 향수도 골똘히 보다가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역시 나하곤 어울리지 않아. 하고 생각했다.
자,꾸 아,베군 하고 겹,쳐보여,서.
향수,라는거. 이상,해.
다른 사람,인데. 같은 향,기가 나면,
금세 떠,올라..
치..치사,해..
아베는, 미하시가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의 의미를, 이제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향수를 마지막으로 상자가 닫힌다. 딱 상자 한 개 분의 추억이었다. 니시우라 고교 3년간의 추억은, 그만큼 이었다.
(+)
+ep
"타카!!! 학교 늦는다!!! 언제까지 잘 거야?!!"
"일어났다고!!!!"
아베는 큰 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슬금슬금 침대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한 손에 칫솔을 들고 나와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전공책을 챙겼다. [스포츠 심리학의 이론] 다시 졸음이 쏟아질 것 같은 제목이었다. 양치질까지 다 끝내고는 대충 옷걸이에 걸쳐두었던 변함없는 패션으로 집을 나섰다.
어깨 한쪽에 가방을 둘러메고 자전거를 끌고 나오다가 우편함에 우편물이 가득히 삐져나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미 시간은 촉박했지만 도저히 눈에 거슬리는 그 우편물을 내버려두고 나올 수가 없어 작게 혀를 차곤 우편함을 열었다. 고지서가 한바탕 쏟아져 내렸다.
"엄마!!! 이것 좀 정리 좀 해!! 아!! 오늘 가스비 내는 날이다. 들려?!!"
집안에선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또 아침 드라마에 푹 빠져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작게 중얼거리곤 고지서는 고지서별로 정리한다. 그렇게 빽빽하던 우편함을 한번 비우고 나니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하얀 봉투가 한통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언제적 거냐..."
손을 뻗어 그것을 꺼내본다. 아베의 표정이 잠시 멈춘다. 서둘러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베는 그 후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아주 한참을, 그저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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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서" 라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희 지금은 그렇게 붙어다녀도, 졸업하면 결국 안 만나게 된다. 알고 있냐?"
우리들의 앞에는 영어 사전과 교과서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미하시는 열심히 영어 문제집을 들고 끙끙 앓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영어는 자신 없는데..하고 생각하면서도 내버려 둘수가 없어 함께 끙끙거리며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를 하는 내내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불쑥불쑥 떠올랐다. 갑자기 나타나선 웬 생뚱맞은 말을 아무렇게나 던져 주고 퇴장하다니, 아들의 공부를 방해할 셈이냐! 속으로 들리지 않는 욕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버지가 뱉어낸 그 발언을 마음껏 비웃었다.
전공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빠져나오는데 등 뒤에서 "아베!!" 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돌아보니 고교 졸업 이후 만남이 뜸했던 타지마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싱글거리며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왠일이야?’ 라는 질문에 "요 근처에 왔다가 말이야, 너 생각나서" 하고 대답한다.
반가운 마음에 녀석을 데리고 대학 근처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녀석은 ‘나는 커피 같은 거 관심없어.’ 라고 말했지만, 딱히 갈 곳도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커피를, 타지마는 레몬에이드를 시켜놓고 쏟아지는 대화는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한참을 야구 얘기와 서로의 근황으로 무르익다가 자연히 녀석과 나를 이어주는 고교 시절의 시간으로 옮겨간다. 타지마는 "나는 정말 그때 하나이가 홈런을 쳐 낼 줄은 몰랐다니까.." 하며 분하다는 듯이 3학년 마지막 어느 시합에서의 기억을 건져 올렸다. 나는 맞장구 쳐주듯 소리를 내고 웃었다.
"하나이랑 가끔 연락하는데, 녀석도 꼭 옛날 얘기하면 네 얘기가 더 많더라."
"그래? 크크큭.."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만족스러웠던 ‘그 시절’을 더듬어 떠올려보니 금세 가슴 한구석에선 쓸쓸함이 묻어 나왔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추억을 그저 바라만 보며 감상한다는 것은 상당히 조바심이 나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 시절은 영원히 계속되지 못했던 걸까. 왜 우리는 졸업 후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던걸까.
늘 생각하게 되는 이 질문엔 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킥킥 거리다 잠시 대화의 흐름이 끊어지는 순간에 타지마는 갑자기 나를 향해 물어왔다.
"미하시하곤 자주 만나냐?"
미하시의 이름이 나왔을 땐 죄를 지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가끔 고교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녀석들은 항상 나에게 미하시의 안부를 물어왔다. 그럴 때마다 녀석에 대해 아는 소식이 아무것도 없는 나로선 항상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미하시..하고는 졸업 후론 연락 해 본 적이 없어."
"어라? 그랬던가? 그랬었어?"
"....몰랐냐?"
"흐음.."
이 말을 꺼낼 때면 언제나 다들 같은 반응이다.
놀랍다는 반응을 하다가도 그 표정을 금세 지우지만 결국은 어색하게 대화가 끊기게 된다
졸업식날, 친구들 사이에 묻혀 있는 미하시와 눈이 마주쳤을 때 녀석은 당연하게도 다른 친구들을 뒤로하고 나에게로 뛰어왔다. 막 봄에 들어선 날씨는 아직 추웠다. 녀석이 추워서 빨개진 코끝을 찡그리며 훌쩍이더니 어느새 눈엔 눈물이 맺혔다. 그것이 추워서 맺힌 눈물인지 아니면 특별한 이유를 가진 눈물인지 눈치 채지 못한 채 나는 그저 당황해서 팔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가슴에 품었다.
"울지 마"
..이 말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미하시는 눈물이 조금 맺혀 있을 뿐이었다. 결국은 그 한마디에 미하시는 정말로 울어버렸다. 어찌나 오래 울던지 나는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오랫동안 감수해야만 했다. 겨우 눈물이 멈추었나 싶어 내려다 보았더니 녀석의 눈물과 콧물로 코트의 가슴 부근이 엉망진창이었다. "더럽게시리.." 농담으로 무안을 주고 티슈를 꺼내어 닦았다. 닦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나도 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곤란했다. 코끝이 찡해지는 그것에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곤란했다.
말없이 녀석과 교정을 한바퀴 돌고 야구부로 돌아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앉아 있으니 녀석이 살그머니 내 손을 잡아온다. 그리고 우린 역시나 말없이 손만 잡은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차가운 기운이 벽을 통해 전해져 왔다. 추워서 집에 가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몸을 일으키기가 힘이 들었다.
"미하시"
내 목소리에 미하시의 손이 움찔했다.
"안 추워?"
나를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덜덜 떨리는 몸을 안고 부실을 나왔다. 우리가 나왔을 즘엔 이미 교정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무섭도록 고요한 공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나를 눌러오는 감각이 무거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뿌리칠 수 없는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힘겹게 서 있었다.
헤어져야 하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근거도 없는 두려움과 부대끼며 힘겹게 서 있자니, 미하시가 잡고 있던 손을 살짝이 놓고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곤 한걸음 멀어진 채로 나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아,베군.. 졸업해도, 연,락해.."
그렇게 말하는 미하시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응, ..하고 대답을 했다.
교문을 나서는 동시에 내 안에 가득 담겨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입을 틀어막았다. 눈앞이 희뿌예지다가 그쳤다. 갑자기 세찬 바람을 맞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뒤 돌아 보았을 때 이미 미하시는 없었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부실로 가버린 걸까? 라고 생각은 했지만 찾아 나서진 않았다.
전화하면 돼.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걸었다.
생각과는 달리 미하시에게 연락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턱대고 번호를 누르다가도 정작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대로 놓아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연락을 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그것은 미하시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녀석에게서 나에게 연락이 오는 일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3개월을 그렇게 보내고 나는 핸드폰을 바꾸었다. 바꾸면서 몇몇 친구들에게 수정된 번호를 알려주고, 긴 통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미하시에겐 역시나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내가 먼저 연락을 한다는 것이 왠지 억울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미하시는 이미 나를 잊고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녀석도 녀석대로 바쁘게 살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새 핸드폰 번호라는 핑곗거리로 연락을 해 봤자 곤란해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미하시가 사는 공간의 흐름을 알 수가 없었고, 그 녀석의 생활이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예상하는 것 조차 힘에 겨웠다. 그 녀석의 일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내 귀에 들어오던 고교시절과는 이미 너무나도 멀어져 있었다. 그런 만큼 부딪혀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자신감만 상실해 갔다
"미하시랑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넌? 연락하고 지내?"
"당연하지~ 근데 횟수는 많이 줄었어. 졸업하고 나선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음.. 일주일에 한번 정도랄까.."
연락하고 있었구나...
내가 전화기를 들고 몇 번이나 쓸데없는 고민으로 주저하고 있을 때 미하시는 타지마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궁금했다. 무슨 대화를 해? 물어보고 싶었다. 전화를 해서,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오랜만이야? 잘 지내? ..그리고? '왜 전화했어?' 라고 물어 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미하시는 요즘 뭐하고 살아?"
"아~ 미하시..? "
타지마는 무언가 입에 담으려다가 곧 집어삼키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궁금하면 직접 전화 해보지 그래?"
"....이제와서.. 연락한다는게 좀.. 그렇네?"
"뭐가 그렇다는거야?"
"...그러게, 그냥 좀.."
타지마는 레몬에이드를 갑자기 원샷 하듯 마셔버렸다. 그러더니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크하~" 하고 신음소리를 뱉는다. 그 모습에 나도 자연히 얼굴이 찡그려진다.
"아베는 미하시 안 보고 싶은가 보구나."
"...보고싶..고 말고 할 게 뭐 있냐?"
"안 보고 싶어?"
".....그러니까.. 친구로써, 궁금하긴 하지.."
"흐음. 미하시는 자주 너 보고 싶다고 말하던데."
타지마는 이미 얼음만 남아 있는 잔을 빨대로 동글동글 굴리며 태연하게 앉아 있다. 나는 타지마가 아무렇지 않게 던져준 그 한마디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허세를 부리듯 대답했다.
"내가.. 보고 싶대?"
"응. 그래서 내가, 보면 되잖아? 라고 말하면 늘 뭔가 웅얼거리다가 넘어가거든. 왜 그러나 했더니, ..."
"......"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타지마와 가게를 빠져나와 헤어지기 위해 역까지 함께 걸었다. "연락해" 하고 말하는 타지마에게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게 아니라~" 라며 짜증을 낸다.
"미하시한테 연락하라구.."
나는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께"..라는 쓸데없는 한마디를 덧붙히며..
타지마가 가버린 후에도 나는 한참이나 역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몇 번이나 열차가 지나가고 사람들도 그만큼 몰려왔다가 빠져나갔다.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꼭 졸업식 날의 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졸업식날 부실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미하시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졸업 후에도 연락하라는 짧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 얘기를 하던 미하시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도 보였다. ‘응’이라는 내 짧은 대답에 미하시는 조용하게 웃었다.
졸업을 해도,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미하시와 내가 멀어지는 일이 고작 졸업이라는 이유 때문일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다. 그땐, 서로가 살아가는 공간이 바뀐다는 것이 우리 사이의 큰 걸림돌이 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는 변했다. 나는 더이상 미하시와 나란히 걸을 수 없었다.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 위에 미하시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미하시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야 하는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미하시를 만나야 할 '핑곗거리'가 사라져버렸다. 단지 그것 때문에 나는 미하시에게 끝끝내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하시도 더는 내 연락을 기다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제멋대로 단정 지어버렸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은 미치도록 보고 싶은 주제에, 사실은 목소리가 듣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던 주제에, 그렇지 않은 척 외면 해 온 나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그 우습지도 않은 노력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참을 혼자서 크큭거리며 웃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응. 맞아. 나야. ....잘 지냈어?"
졸업을 하고 1년이 넘었다.
미하시를 떠올릴 때마다 그날 벽을 타고 넘어오던 시리도록 차가운 감각이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던 미하시도, 어째서인지 내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던 미하시도, 연락을 하라고 말하면서도 어딘지 불안한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던 미하시도, 마지막으로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도, 무엇하나 빠짐없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화기를 들었다가도 연락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번호를 끝까지 누를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녀석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하다고 제멋대로 생각했었다.
"....보고 싶어서."
이 말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었어..."
이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녀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손을 잡아 주던 미하시의 온도가 생각났다. 얼굴을 감싸쥐었다.
멀리서 또 한대의 열차가 시끄럽게 울어대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소음이 순간 미하시의 목소리를 집어삼켜버렸지만, ...금세 되살아나는 녀석의 목소리는,
주변의 소음에 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고 정확하게 내 귓속을 파고들어 한참을 떠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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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캄캄한 방 안에서 잠이 오지 않아 천장만 노려 볼 때라던가,
아침에 세수를 한 후 거울을 쳐다볼 때라던가, 출근을 하며 현관에 열쇠를 꽂을 때라던가,
아무 생각 없이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며 멍하게 서 있을 때라던가,
일상의 균열을 깨고 찾아오는 그런 순간에....
탁, 하고 데스크 위에 종이컵 하나가 놓인다.
나도 모르게 딴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 소리에 흠칫 반응을 하며 올려다보니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여직원이 생긋 웃으며 서 있었다.
"팀장님, 커피 한잔하세요.."
"아, 고마워.."
눈앞에 놓인 종이컵을 들어 올리자 강한 커피 향이 확 풍겨온다.
'졸렸던 걸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나 뭐하던 중이었더라..'
주변을 살폈다.
"아베 팀장님도 오늘 회식자리에 함께 하실 거죠?"
"아, 아아, 가야지."
그러고 보니 오늘은 회식이 있다. 솔직히 요 며칠 계속 잡고 있는 프로젝트가 꽤 신경이 쓰여서 한눈팔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같이 일하는 직원 하나가 곧 결혼을 한다고 말했다. 그것을 축하하는 자리에 팀장인 내가 빠질 순 없었다.
방금 받은 커피를 모두 비우고, 다시 눈앞에 있는 모니터 화면을 향했다. 깜박깜박. 언제부터 멈춰있었는지 모를 커서가 텍스트 문서 위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금세 지나갔다. 시계가 7시를 가리키자마자 직원들은 자리에서 튕겨 오르듯 일어나 웃옷을 챙겨든다. 이런, 이런, 하여간 이럴 때는 누구보다 빠르다니까. 속으로 불만을 뱉고 마찬가지로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원들이 자주 찾는다는 단골 술집으로 들어가 대충 자리를 마련하고 앉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곧 결혼하게 될 후유타군이다. 축하하는 의미에서 그의 술잔에 술을 한잔 따라주며 말했다.
"하필 가장 바쁜 시기에 결혼한다는 후유타군을 위해 건배"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비아냥을 섞어 농담을 했더니 다들 바보처럼 웃으며 잔을 들었다.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단숨에 내려갔다. 역시, 나는 술보단 커피가 더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게 될 사람이 후유타군 첫 사랑이라면서?"
한 직원이 그렇게 물었다. 후유타는 헤벌쭉 입을 벌리며 뒤통수를 긁었다.
첫사랑? 정말로?
스물여덟이나 된 사람이 첫사랑과 결혼을 한다니, 그 말이 사실일 리가 없잖아? 싶은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흘끔 시계를 쳐다보니 어느새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다. 그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을 뿐인데,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슬슬, 일어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다들 흥에 겨워 집에 돌아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어쩔 수가 없어 가볍게 한숨을 쉬고, 다시 술잔으로 손을 뻗는데, 후유타가 가까이 다가왔다.
"팀장님, 제 잔도 한잔 받으시죠."
"아..."
그가 술을 따라주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입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결혼하는 사람이 정말로 첫사랑이야?"
대뜸 그렇게 물었다.
"하하, 뭐, 그런 거나 다름없죠."
...아니라는 소리군.
능청맞게 대답을 피해가는 그것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다. 후유타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내가 기분이 좋다고 생각한 것인지 또 다시 말을 붙여온다.
"팀장님은 첫사랑이 언제였어요?"
"뭐?"
후유타의 질문에 모든 직원의 시선이 나를 향해 쏠렸다. 몇몇 여직원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빛이 날 정도였다.
"뭐, 첫사랑이라... 고등학교 1학년 때였을까나.."
"우와~ 말도 안 돼. 팀장님 왠지 잘 나가셨을 것 같은데 꽤 늦네요?"
"...늦어? 흐음, 그게 첫사랑이란 걸 깨달은 건 대학교 들어가서니까 훨씬 늦었지.."
후유타가 따라준 술을 단숨에 마셔버리자, 녀석이 또다시 금세 채워버린다.
"팀장님 첫사랑 얘기 처음 들어요~ 더 해주세요~~"
구석에 앉아 있던 여직원들이 꺄꺄거리며 소리쳤다. 너희가 여고생이냐.
술을 또 한잔 입에 머금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엔, 싫었어. 왠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이 짜증이 치솟고, 우물쭈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그 바보 같은 모습이 짜증이 나서, 언제나 나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 불안한 시선이라던가, 나를 경계하는 움찔대는 행동이라던가, 조금만 부딪혀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그런 반응이, 내 이름을 부를 때면 항상 겁에 질려 있어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하여간, 짜증 나는 인간이었어."
분위기가 썰렁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주제에 녀석은 항상 내 주변을 얼쩡거렸지. 가끔은 무방비하게 웃기도 했어. 분명 그 녀석과 나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멀게 느껴졌음에도 항상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였어. 그 미묘한 거리가 말이지, 도대체 나를 따르는 건지, 무서워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게 초조했었어. 그래서 짜증이 났어. 결국은 눈도 마주치기 싫을 정도로.. 정말 싫었어."
뭘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거냐.. 라고 느끼면서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그 말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술기운인가? 하는 기분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첫사랑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후유타가 물었다.
"....대학 들어가서,.."
그가 몸을 바짝 기대어 오며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들이 물었지. 첫사랑이 언제였냐. 어떤 사람이었냐고."
"....?"
"...그럴 때마다 항상 스치는 게 걔 얼굴이었어."
"호오.."
"그제서야"
나도 모르게 내려놓은 술잔으로 다시 손이 향했다.
"...아아, 나는 그 녀석을 좋아했던 거였구나. 싶었지."
거기까지 말하고, 이번엔 스스로 술을 한잔 따라 집어삼켰다. 이미 몇 잔을 마신 탓인지, 혀에서 느껴지는 쓴맛의 감각은 첫 잔 보다 훨씬, 둔하게 느껴졌다.
"후유타! 집에 갈 수 있겠냐?!"
"예..예에..괜찮습니다.."
녀석을 택시에 던지듯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다른 직원들도 취기에 해롱거리면서도 다들 나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제각각 발길을 옮긴다. 시계를 보니 다행히 지하철이 끊기기 전이었다. 서둘러 역을 향해 뛰었다. 헐떡이며 역에 도착했을 때, 운 좋게도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에 밀리며 지하철에 몸을 싣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자리에 털썩하고 앉았다. 지하철이 약간의 흔들림을 동반한 채 움직였다. 맞은편으론 새까만 유리창에 내 모습이 뿌옇게 자리 잡고 있었다.
덜컹덜컹. 규칙적인 소음에 집중하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져 머리가 무거워졌다. 고개를 푹 떨구고 눈을 감았다. 제대로, 잘 내려야 할텐데... 그런 것에 불안해하며, 서서히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아득해지는 그 순간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꼭 이런 순간에,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정신을 놓고 멍하게 있을 때라던지, 주변이 고요할 때라던지,
버스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눈앞의 창문만 빤히 쳐다볼 때라던지,
지하철에서 꾸벅 졸다가 갑자기 눈이 떠졌을 때라던지,
일상의 균열을 깨고 찾아오는 그런 순간에,
언제나 떠오르는, 한 사람.
"첫사랑, ...이라.."
덜컹, 덜컹.
지하철의 소음이 조금씩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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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열었더니 웬 꼬마 녀석이 앉아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넌 누구야?"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 꼬마는 커다란 종이 박스 안에 앉아 있었다. 개도 아니고, 종이 박스라니?! ..경악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박스 안을 살펴봤지만 쪽지라던가 편지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저,씨 누구,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임마.
"......?"
"아베 타카야. 이 집. 주인이다."
무시하고 출근하자니 아무래도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왜 하필 그 많은 집 중에 우리 집 앞이야? 싶었다. 꼬마는 언뜻 다섯, 여섯살 정도 되어 보였다. 이 추운 날! 어린 애를 여기다 버리고 간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일까. 그런 것에 분노를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는 추위에 떨지 않는듯 했다. 이곳에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꼬마는 고동색 면바지에 파란색 후드 티를 입고 있었다. 옷은 그다지 더럽지 않았다. 아이는 하얗고 보송한 솜털 같은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아이가 왜 우리 집 앞에 버려져 있는 걸까.
"엄마는 어딨어?"
녀석은 이번에도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예, 죄송합니다. 감기인가봐요..에? 아니오 '쿨럭' ....기침 나오는데요. 네.."
꾀병은 처음이라 난감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 걸까? 설마 본인이 아프다는데 '거짓말이지? 회사 나와' 하고 말할 상사는 없겠지. 설사 꾀병이란 것을 간파한다 하더라도 내가 아프다고 고집 피우는데 저쪽도 손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어설픈 연기로 상사를 속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통화를 끝내고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이마를 짚었다. 시선을 돌리자 전화기 너머로 보이는 꼬마 녀석의 동그랗고 커다란 눈과 마주쳤다. 사심없는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 하다못해 이름 정도는 가르쳐 줘야 내가 널 도와주든 말든 할 거 아냐."
일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어째서 무시하지 못한 거야? 그냥 지나쳤으면 아이 엄마가 다시 데리러 왔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안 되겠다면 가는 길에 경찰서에 넘겨버렸음 됐잖아? 그런데 내가 왜 회사를 쉬어야 해? 이런저런 생각에 짜증이 나서 인상을 쓰고 물었더니 아이가 무서웠는지 순간 어깨를 떨었다.
".....이름, 말해 봐."
".....레..ㄴ..렌.."
"......렌,렌?"
"렌!,..레엔~ .."
"......그러니까 렌렌 이라구??"
"........우윽..."
들리는대로 따라했을 뿐인데 뭐가 불만인지 볼에 심통을 가득 물고 입을 우물거린다.
"그래, 렌렌.."
"아,니.."
"앙?"
"....렌,렌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거야. 렌렌 이라며.."
"..윽.......흐에엥...!!"
"어..어?? .....잠깐.. 왜 우는 거야? 어이!!"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녀석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웠기도 했고, 길에 버려져 있던 애를 울리고 말았다는 묘한 죄책감에 당황스러웠다.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까 그저 마음만 초조해졌다. 그렇다고 어떻게 달랠 방법도 생각나지 않아 그저 발만 굴렀다. 내가 요령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건지 나는 우는 녀석을 달래기 위해 말 한마디, 등 한번 쓰다듬어 줄 수가 없었다. 우는 녀석은 우느라 힘이 들고, 나는 나대로 귀를 막고 버티느라 힘이 들었다. 렌렌은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결국은 제풀에 지쳐 서서히 울음소리가 잦아지는 듯 하더니, 울음을 그쳤다.
히끅히끅 딸꾹질을 하며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기분 나쁜지 두 손과 소매로 얼굴을 마구 비벼댄다. 나는 드디어 울음을 그친 그 녀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급하게 걸어오자 녀석이 또 한 번 움찔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다시 울음이 터질까 봐 움찔한 채 발걸음을 멈췄다. 렌렌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글썽글썽, 콧물이 방울방울.
더럽다.
"...이리 와. 기분 나쁘지? 얼굴 씻으러 가자."
가까이 가지는 못한 채 손만 내밀어 녀석을 불렀다. 녀석은 잔뜩 경계의 빛을 감추지 않았음에도 내밀어 진 손을 못 본체 하지 못 하는 것인지 결국은 내 손을 꼭 잡는다. 그 조그만 손에서 전해져 오는 미미한 악력을 느끼는 순간,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단둘이 남게 된 아무런 힘도 없는 조그만 꼬마의 입장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녀석은 내가 무서워도, 내가 두려워도, 나를 거절하지 못한다. 지금으로썬 내가 유일하게 이 녀석을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어른이란 존재는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의지가 될 것이다. 녀석에게 나는 두려운 존재겠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에게서 떨어지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내 손을 잡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녀석의 손을 힘을 주어 잡게 된다.
"괜찮아."
그 한마디에 녀석이 반응했다.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고개를 숙인다.
고개 숙인 그 아래로 눈물 방울이 똑똑 땅으로 추락했다.
* * *
비누거품을 잔뜩 내주었더니 렌렌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욕실 전체에서 울려 퍼졌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소리를 죽이지 못하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빽빽 소리 질러 울기 바쁘더니 이번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웃느라 정신이 없다. 이래서 애인 건지, 아니면 유독 이 녀석만 그런 건지, 평소 어린 애들하고 인연이 없던 나로썬 잘 모르겠다.
렌렌을 욕조에 넣고 구석구석 씻겼다. 녀석이 비누 거품이 신기한지 쉬지 않고 물장구를 쳐대느라 덕분에 입고 있던 상의가 홀딱 젖었다.
"어이, 렌렌. 가만 못 있겠냐. 물 틔잖아."
"..렌,렌 아,니..야..!"
"응?"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겨.."
머리를 감기려고 샴푸를 묻혔더니, 역시나.. 발버둥을 친다. 딱 한 번 개를 길러본 경험이 있었는데 개를 목욕시킬 때도 머리를 감기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역시 사람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으왓! 가만 있으라니까!"
"싫,..싫어..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머리는 감아야지!!"
"싫,어어..~"
"잠..으왓! 잠깐..어이!"
"누운..눈,,아,프.."
"......어? 아, .."
눈에 거품이 들어갔는지 눈을 잔뜩 찡그리고 얼굴을 든다.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었더니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나를 노려본다. 네가 노려봐서 어쩌겠다는 거야. 머리 감는 게 그렇게 싫냐? 고집스러운 눈빛. 어느 쪽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없이 노려보았다.
"렌렌"
"우윽..!"
"....머리 감고, 깨끗이 씻으면, 아저씨가 피자 사줄게"
"피,자 싫,어.."
애들은 다 피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한 말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돌아오는 거절에 잠시 당황했다.
"그래? 그럼 뭐 사줄까?"
"야구,공.."
"......하?"
"야구,공.."
"......알았어. 그럼 야구공 줄게. 그럼 머리 감을 거야?"
그렇게 묻자 힘없는 고개가 작게 위아래로 두 번 움직였다. 도대체가 다루기가 쉬운 건지, 어려운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목욕을 끝내고 나와 벗겨두었던 옷을 다시 입히는데, 바지는 상관없었지만 후드 티는 녀석의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시 입히기엔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방안을 다 뒤져 녀석이 입을만한 옷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집에 어린 애가 입을만한 옷은 보이지 않았기에 캐쥬얼 남방을 아무거나 하나 들고와선 녀석에게 입혀 주었다. 커다란 옷이 녀석에겐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지만 그래도 팔은 걷어올리고, 길이는 바지 속에 집어 넣으면 어떻게 입고 있을 만은 했다. ....좀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뭐, 이대로 일단 오케이다.
약속대로 녀석에게 집에서 굴러다니던 낡은 야구공을 던져줬다. 렌렌은 야구공을 보더니 활짝 웃는다. 아직은 물기가 촉촉이 젖어있는 녀석의 머리에서 샴푸 향이 솟아오른다. 평소엔 집에서 향기를 찾아볼 수가 없는데 렌렌이 코앞에서 뛰어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달콤한 냄새가 주변을 맴돌았다. 렌렌은 야구공을 꼭 쥐곤 땅 위에 굴려보더니 굴러가는 야구공을 다다다 쫓아가 다시 주워 들고 와선 그 행동을 반복했다. 야구를 좋아하나? 나도 어릴 땐, 야구를 좋아했었지... 렌렌을 지켜보다가 그런 생각에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웃음소리에 렌렌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이쪽을 빤히 쳐다 보길래 '뭘 봐?' 하는 심정으로 쏘아보았더니 금세 고개가 돌아간다.
"렌렌, 이리 와."
분명 날 어려워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음에도 녀석은 슬금슬금 내 앞까지 걸어왔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으로 녀석의 머리를 마구 부볐다. 처음엔 싫다고 발버둥을 치다가 머리를 꽉 잡고 양 옆으로 두 세 번 휙 휙 흔들어줬더니 그게 또 재밌었는지 까르르 웃어댄다. 나도 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보같이 따라 웃었다.
목욕 기운이 남아있어서인지 렌렌은 혼자서 놀다가 곧 잠들어 버렸다. '이제야 좀 조용해지겠군..' 안도의 숨을 뱉고 녀석을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혀 두고, 거실로 가 바닥에서 뒹구는 녀석의 후드 티를 챙겨두고자 들어 올리는데 주머니에서 예상 밖의 물건이 툭 떨어졌다.
사진이었다.
엄마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와 함께 렌렌이 찍혀있었다. 사진 속의 렌렌은 방금까지 나에게 보여줬던 미소를 한껏 머금고 카메라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내밀고 웃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을 향한 것일까? 찍어 준 사람은 아버지일까? 꽤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의 이 사진 만으로썬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렌렌을 우리 집 앞에 버려야 했던 건지 그런 사정은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안다고 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렌렌이 우리 집 앞에 버려져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집 앞이었을 수도 있고 나는 오늘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출근해 특별하지 않은 오늘을 보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사진 쪼가리를 훔쳐보고 렌렌을 주웠다고 해서 그들의 사정을 내가 알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 사진을 후드 티와 함께 종이 봉투 안에 넣어 두었다.
다시 침실로 돌아왔더니 침대에 눕혀 둔 렌렌은 어느새 침대 한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 잡고 팔 다리를 죽 뻗고 자고있었다. 너무나도 태평한 그 모습에 또다시 웃음이 터져 벽에 기대어 서서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소리를 죽여 웃었다.
* * *
"그래서 어쩔거야? 쟨?"
회사 동료인 사카에구치가 감기라는 소문을 들었는지 문병을 왔다. 물론 멀쩡한 내 모습을 보곤 어이없어했지만, 내 방 침대에 누워 있는 렌렌을 발견 했을 땐 기가 막혀 했다. 사카에구치에게 사정 설명을 해 주었더니 녀석은 더더욱 기가 차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나 자신도 조금은 기가 막혀 오기는 했다. 대체 난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마음에 든 거냐? 애가 귀여워서 데리고 살고 싶어졌냐?"
".....버려진 애야. 쟤가 장난감이냐?"
"그런 식으로 말한 거 아니잖아. 어쩔거냐고."
"..........."
"경찰에 연락할 거지?"
말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사카에구치는 자기 멋대로 해석해버린 건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난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응.."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무슨 일이 있겠냐?"
"어쨌든 말이다."
그는 그렇게 말을 하더니 렌렌을 흘끗 쳐다보곤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 * *
"당근 먹어!!!"
"싫,싫어..요...우윽.."
렌렌이 눈을 떴을때 조금 빠르긴 했지만 저녁으로 카레를 만들어주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당근이란 당근은 모조리 걸러내선 접시 밖으로 흘려 둔다. 거기에 모아 놔 봤자 소용없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꾹 누르며 애써 톤을 죽이고 말했다.
"먹어. 맛있잖아. 왜 안 먹는거야?"
"당,근 싫,어..."
녀석의 대답에 한숨을 푹 쉬었더니 녀석이 나를 힐끔힐끔 보다가 멈추었던 숟가락을 다시 움직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쓰는 숟가락밖에 없으니 그것이 좀 컸던지 제대로 입속으로 가져가지 못해서 밥을 투둑 흘리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녀석은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보다가 결국은 손으로 떨어진 그것을 주워 먹었다.
"렌렌, 토끼 좋아해?"
"우,응. 토끼 많,이 좋아!"
"그래? 그 토끼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고개를 젓는다. 몇 살인데 아직도 그걸 몰라??
"당근이야. 너 당근 안 먹으면 토끼는 너 싫어할걸?"
".....저,정말..?"
"그럼. 아저씨는 어른이야. 모르는 게 없지. 토끼한테 미움받고 싶어?"
"우윽..싫,싫어.."
"싫지? 그럼 먹어."
내 말을 듣곤 조금 망설이다가 녀석의 손 끝이 조심스럽게 당근을 향했다. 접시 밖으로 버리듯 내려 둔 당근을 하나 집어들더니 순식간에 입 안에 넣고 꿀꺽 삼키곤 "으윽..." 하는 신음 소리를 뱉어내며 눈을 질끈 감는다. 그렇게까지 당근에서 독특한 맛이 나는 건 아닐 텐데 렌렌은 일일이 반응하며 억지로 집어삼키듯 전부 입속으로 가져갔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 당근을 다 먹었을 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녀석은 잠시 움찔하다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저녁을 다 먹고 녀석을 다리 위에 앉히고 뉴스를 봤다. 혹시라도 납치라던가, 유괴라던가, 미아를 찾는다는 광고라도 나올까 봐 여기저기 돌려봤지만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녀석은 한 손에 야구공을 꼭 쥐고 알고 보는 건지 모르고 보는 건지 나와 함께 TV를 주시하고 있었다. 뉴스가 끝나고 어디선가 만화영화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찾아낼 순 없었다. 렌렌은 TV 속 광고가 꽤 마음에 들었던지 CM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넋을 잃고 쳐다보는 녀석을 바닥에 앉혀 두고 베란다로 향했다.
자동차가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긴장됨을 느꼈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는데 바짓자락을 끌어당기는 힘을 눈치 챘다. 내려다보니 렌렌이 서 있었다.
"왜?"
"별.."
"응?"
렌렌이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날이 완벽히 저물지 않았기에 별이 확실하게 보이진 않았다.
"아직은 안 보여. 좀 있다가 봐"
"보,여 줄,거야..?"
".....응"
"...우힛.."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한 소리를 내고 웃는 녀석의 머리 위로 손이 향하다가 멈춘다. 나는 렌렌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곤 어리둥절 해 하는 녀석을 데리고 현관을 향했다.
* * *
"전화받고 왔습니다. 이쪽은 아동 복지 담당인....."
문을 열었을 땐 경찰과 함께 새까만 단발 머리를 자랑하는 한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차가운 무테 안경은 그다지 따뜻한 기운을 머금고 있지 않았다. 가늘게 찢어진 눈이 더더욱 차가운 인상을 주었지만 나는 그냥 꾸벅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 인가요?"
"네.."
그렇게 말하며 렌렌을 그녀 앞으로 밀었더니 녀석이 잔뜩 겁을 먹곤 내 다리 뒤로 숨어버렸다.
"렌렌. 인사해. 이 아주머니가 널 도와주실 거야.."
내 말에 녀석은 제대로 이해를 못했음이 뻔한 눈길로 나를 한번 보고 그녀를 향해 크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을 땐 역시나 내 다리 뒤로 한껏 웅크린 채 숨어버렸다. 바짓자락을 잡아 당기는 녀석의 힘이 점점 커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일단 어머니 쪽의 행방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이건 이 녀석이 입고 있던 옷인데 안에 가족 사진같아 보이는 것도 들어 있었어요.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경찰은 내가 건네주는 종이봉투를 재빨리 받아 챙긴다.
"이 녀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분간 보호자를 찾아보고, 그래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뭐, 정해진 절차를 밟아야지요."
어설프게나마 그가 말하는 곳이 보육원을 가리키는 걸까 추측해 봤다. 그 생각을 했더니 왠지 가슴이 욱씬거렸다. 나는 애써 그 기분을 떨쳐내려 노력하며 아직도 내 바짓자락을 꼭 쥔 녀석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 * *
"싫,싫어..!! 싫어!!!!!!!!!"
엄청난 힘으로 바둥대는 바람에 경찰이 녀석을 안아 들었다. 뭐가 그렇게 싫은 건지 악을 쓰며 울부짖는 녀석을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싫다고 소리치면서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지만 모르는 척 했다. 녀석은 더더욱 큰 소리로 울었다.
"뚝 그쳐!!"
버럭 소리를 질렀더니 깜짝 놀라 그친다. 하지만 눈물은 여전히 매달려 있었으며 억지로 닫혀진 입은 움찔거렸다. 경찰에게 잠시만 양해를 구하고 녀석을 안아 들었더니 렌렌은 굉장한 기세로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왔다. 등을 토닥여 줬더니 후엥후엥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작게 울었다.
"렌렌, 잘 들어. 저분들이 렌렌의 엄마를 찾아주실 거야."
"싫,어..! 싫,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딱 잘라 말했더니 내 말을 알아 들은 건지 투정이 그치고 발버둥이 멈춘다. 하지만 내 목을 끌어안은 팔의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 보고 싶잖아. 엄마 찾아줄게."
"...아저,씨가 더, 좋,아..!"
".......렌렌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희 엄마야."
".....싫어..싫,어..!!"
"놀러갈게. 렌렌이 엄마 찾고 집으로 돌아가면 아저씨가 놀러갈께"
"...싫어어......."
싫다고 억지를 쓰며 얼마 되지도 않는 힘을 짜내어 나에게 꼭 매달려 온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무도 날 떼어낼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매달려 왔다. 나는 그런 렌렌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저씨 말 들어. .....착하지?"
착하지? 라고 묻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착하고 싶지 않은 어린 애는 없다. 특히나 렌렌의 입장에선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나쁜 아이는 다들 미워하니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착한 아이이고 싶다. 그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렇게 물었다. 예상대로 렌렌은 얌전히 떨어져 나간다. 경찰관의 품에 안겨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어깨만 들썩였다. 울음소리를 참고 있는 것이 뻔했다. 조그만 게 벌써부터 소리 죽여 울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 녀석을 그렇게 울게 만든 건 나다. 내가 말해도 소용이 없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경찰이 등들 돌려 현관을 빠져나갈 때 나는 렌렌을 향해 말했다.
"담에 만나면 꼭 별 보여줄게."
녀석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대로 현관문은 닫혔다.
* * *
"갔어."
- 갔어? 경찰이 데리고 간 거야?
"응"
- 어떻게 되는 거래?
"뭐, 일단 엄마는 찾아보겠다는데, 못 찾으면 보육원 행인가봐
- ...그렇게 생각하니 좀 불쌍하다.
"보육원이라고 나쁜 곳이겠냐? 괜찮겠지.."
- 흠. ..내일은 회사 나올 거야?
"어"
- ...내일 술 한잔 할까?
"웬 술?"
- 하핫 그냥..
사카에구치에게 짧게 보고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저절로 시선이 소파로 향했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거실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녀석이 펼쳐 놓은 잡지나 책들이 뒹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엔 먹다 남은 과자가 굴러다녔다. 녀석의 머리를 말리던 수건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바닥엔 녀석이 낙서를 한 연습장이 있었고 그 옆엔 싸인펜이 뚜껑을 잃고 누워있었다.
렌렌이 이 집을 빠져나가는 순간, 얼마 되지 않은 그 시간이 꼭 꿈처럼 느껴졌지만, 이 풍경은 녀석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그냥 소파 위에 앉아 버렸다. 테이블 밑으로 야구공이 보였다.
".....안 들고 갔구나...."
야구공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싸인펜으로 야구공에도 낙서를 해둔 것 같았다.
"미하시..?"
이름일까?
"미하시....렌...."
'미하시 렌.'
"........'렌렌'이 아니었구나."
렌렌이라고 물을 때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부정을 하던 녀석의 모습이 스쳐갔다.
"렌렌이 아니라는 소리였구나..."
그 생각에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고집불통인 녀석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도 못 알아듣고 자꾸 이름을 잘못 불렀으니 울어댈 만도 하다. 그것도 모르고 일일이 '렌렌'이라고 불렀던 게 미안하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다. 귓가에서 앵앵대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기억났다. 나에게 도움을 호소하던 눈빛과 내 손을 꼭 쥐어 오던 그 연약함도 생각났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어른이라 미안했다. 이런 나를 크게 의지하고 있었을 녀석의 기대에 부흥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차라리 직접 아이 엄마가 찾으러 올 때까지 녀석을 데리고 있을걸, 하고 잠깐 후회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일이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고, 그동안 아이를 맡길 적당한 장소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녀석을 이 집에 혼자 버려두고 출근을 할 순 없는 일이고, 그게 싫다고 회사를 또 쉴 수도 없는 일이다. 변명이긴 하지만, 나에겐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네가 잡은 손의 주인은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였다.
나는 녀석이 가지고 놀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욕실도 엉망진창이었기에 간단하게 욕실 청소를 끝냈다. 욕실을 청소하다가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내 남방을 그대로 입고 갔다는 것이 기억났다. '하필 그런 옷이라서 미안하다.' 속으로 사과를 했다. 야구공은 다시 본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청소를 끝내고 나는 다시 베란다로 나가 숨을 돌리다가 피지 못했던 게 생각 나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한 개 꺼내 물었다. 불만 붙이고 손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서 물고 있는 채로 빨아들이고 연기를 토했더니 담배 연기가 눈을 찔러와 많이 매웠다. 눈물이라도 흐를 것처럼 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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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림자는 나를 향해 돌아서더니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곤 금세 사라졌다.
그림자가 사라졌을 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찾았다.
하지만 곧 화면이 '출렁'하고 흔들리더니 꿈에서 깨고 만다.
꿈에서 깨어났을 땐 머리가 아팠다. 머리가 부풀어 올라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통약을 성의 없이 씹어 삼키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또다시 그 그림자가 꿈에 나올까 두려웠다.
"똑같은 꿈을 3일째 꾸고 있어. 아~ 지긋지긋 해."
대학 구내 매점에 들어가서 종이 팩에 들어 있는 커피우유를 샀다. 빨대를 콕 하고 찍어넣곤 맘껏 빨아 마신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시원한 느낌이 좋아서 쉬지 않고 마신다. 종이팩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크하~"
"....어이, 아베"
"응?"
하나이의 목소리에 그를 쳐다보았더니 무언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왜?"
"그 꿈에서 말야.. 나온 그림자..라는 거.. 누군지 못 알아보겠냐?"
"하? 새까만데 알아보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도저히 모르겠다니까.."
"...뭐, 특별한 곳이 있다던지..."
"......음.. 아! 어제 꿈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뭐가? 뭐가 달랐는데?"
"음, 목걸이를 하고 있었어."
"에?"
".. 돌고래였던가? 아니다, 나비였나?"
"앙?"
".....하여간 몰라. 목에서 반짝하고 빛나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어. 그것 뿐."
내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하나이는 한숨을 푹 내쉰다.
10분 뒤면 수업이 시작된다. 깐깐한 교수이기에 지각은 곤란하다.
슬슬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이가 뒤 따라 온다.
"하나이"
"응?"
"넌 왜 남의 꿈에 그렇게 관심이 많냐?"
"...내가 관심을 안 가지게 생겼냐? 어쩌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구"
기억이 날아가 버린 것은 벌써 3개월 전의 일이다. 내가 왜 병원 천장을 보며 누워있는지조차 기억해 내지 못했다. 부모님께선 내가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스포츠 심리학이라는 전혀 생소한 과목을 들었을 땐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금세 적응해 갔다. 다행히 나는 부모님을 기억하고 있었고, 슌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이, 타지마, 미즈타니, 사카에구치, 등등 친구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이 날아갔다는 것은 꽤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기억할 사람은 다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굳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은 그것이 꽤 걱정이 되는 모양이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없다.
기억에 없다는 건, 그것을 향한 미련조차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잊고 있는지조차 기억해내지 못한다.
하나이와 전공과목이 다른 나는 중간에서 헤어지게 된다. 수업 마치고 점심같이 먹자. 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의실로 향하려는데 등 뒤에서 하나이가 나를 부른다. 왜? 하고 돌아섰더니, 대뜸, "너, 미하시, 기억나냐?" 하고 물어왔다.
생뚱맞긴.
"당연하지. 같이 수업 듣는데 기억 못할 리가 없잖아?"
내 대답에 하나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강의실에 들어갔더니 미하시가 보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미하시의 옆에 가 앉는다.
"아슬아슬했네. 아직 교수 안 왔지?"
"우,응.."
미하시는 대학에 와서 사귄 친구다. 어째선지 나를 잘 따르기에 마음에 들었다. 언제부턴가 우린 항상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그뿐으로 굳이 학교 밖에서까지 만난다거나, 전화 통화를 주고받는다거나, 메일을 주고받는 일은 없다. 그냥, 함께 수업을 듣는 것 뿐이다. 그뿐인데도, 어째선지 다른 누구보다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이 신기했다. 가끔 하나이는 미하시에 대해 묻곤 했다. 나는 아직도, 녀석이 왜 그렇게 미하시에게 관심을 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라?"
"으,응..?"
"...너 목걸이 같은 거 하고 있었냐?"
"........응! 선,물 받은 거야."
"그래? 흐음, 신기하게 생겼다. 뭐야? 코끼리?"
"으,응.. 인도 코,끼리.."
"흐음...."
꿈에서 본 목걸이도, 꼭 저것처럼 생겼었다. 그게 코끼리였던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내 꿈에 미하시의 목걸이가 나왔던 걸까?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누가 줬는데? 애인?"
"......"
곤란하다는 시선이 나를 향한다. 쑥스러워 하는거야? ...솔직히 애인이 있으면 좀 충격이다.
쑥맥처럼 생겨서 나도 못해 본 연애를 해 봤다는 거야? 우와, 말도 안 돼.
".....소,중한 사람,이 준,거야.."
"흐음..소중한 사람? 누구? "
미하시는 잠시 망설이더니 침을 꼴깍 삼키곤 대답했다.
"......아베,군.."
"..........응?"
"....은, 모르,는 사람,이니까 말 해,줘도 몰,몰라..."
".....쪼잔하긴."
미하시가 헤실 거리고 웃더니 목걸이를 스웨터 안쪽으로 숨겨버린다.
미하시의 옆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의문이 생겼다.
내 꿈에 나온 건 미하시인 걸까? 하지만 왜? 내가 왜 미하시 꿈을 꿔야 하는데?
"미하시"
"응?"
"그 사람, 요즘도 만나?"
별거 아닌 질문에 미하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응.."
"...그래? 애인은 아닌데 소중한 사람?"
".....내,내가, 좋,아하는 사,람.."
"너만 좋아해? 그 사람은?"
"......모,르겠어.."
"흐음. 근데 왜 선물 같은 걸 해 주고 그런 걸까? 이상하네?"
"...응, 이상,해...."
"그래도 좋아하는 거야?"
".......응,"
그 대답을 듣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대화는 끊기고, 나는 약을 찾는다. 허둥지둥 가방을 뒤져 두통약을 꺼내 들었다. 약을 입 안에 넣고 씹어 삼키는데 미하시의 목걸이가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통증이 거세어진다.
"아윽.."
"아,아베군..!!"
쓰러지는 동안은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주변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인다. 멍한 진동이 귓가를 압박한다.
눈앞에서 미하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어라 소리친다.
분명, 날 부르고 있는 거야. 손을 뻗어 녀석의 뺨을 감싼다. 녀석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른다.
울지 마.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울지 마...
.......라고 말해 주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건, 누구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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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음산하게 끈적거리는, 질척한 악의.
"아침 일찍 어디 가시나 봐요?"
편의점에서 야채쥬스 하나를 계산하려고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아르바이트생인듯한 청년이 바코드를 찍으며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기분이 나쁘다. 질문에 아무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쥬스를 돌려받는다. 계산을 하고 그 자리에서 쥬스를 급하게 마시고 편의점을 나선다. 문밖에 나와 주위를 둘러본다. 이른 아침, 사람보다는 쓰레기를 뒤적이다 인기척에 깜짝 놀라 달아나는 고양이나, 하늘 위를 빙빙 맴돌며 까악-까악-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머리 위에 뱉어놓는 까마귀들이 더 눈에 뜨인다. 크게 심호흡을 한다. 두 눈을 꼭 감는다.
괜찮아.
순간, 삐리릭하고 전화가 울린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든다.
"아,아베군.."
- 어디야?
"밖,이야."
-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응, 그,그래도.."
- 후. 알았어. 어딘지 말해. 곧 갈게.
없어진 것은 쓰레기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길에 내놓은 쓰레기. 없어지는 게 당연하다. 누가 자신의 쓰레기를 일부러 가지고 갔다. 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쓰레기통 속에 있던 것은 기껏해야 못쓰게 된 물건, 필요 없는 광고지, 오늘 먹은 음식, 서점에서 사 온 책의 겉 포장지, 못 신게 된 양말, 버리고 싶었던 속옷.
속옷을 버리고 알게 되었다. 누군가, 내 쓰레기를 훔쳐 갔다는 것을.
"미하시!!"
"아,베군.."
"무슨 일 없었어?"
"응.."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니까.."
"미,미안. 그,래도.."
"알아, 그 집에서 빨리 나오고 싶었다는 거."
분명히 버렸다고 생각했던 속옷이 서랍 속에 단정히 개어져 들어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속옷을 펼쳐보았을 때의 충격.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지고 군데군데 찢겨져 나간 어두운 남색. 내 거야. 그런데, 왜..? 어째서 이런 형태가 되어 들어있는 거지? 끈적하게 말라붙어 있는 무언가의 자국. 뭔지 알 수 있어. 구토가 올라왔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 가 변기를 끌어안고 토악질을 했다. 악질적인 장난. 상대는 누구?
"경찰에 연락은 했어?"
"으응.. 못,했.."
"...그래, 경찰은 금방 움직이지 않을 거야. 분명 현장을 잡으라느니, 어쩌느니 말만 많겠지."
"......또, 올,까..?"
"나야 모르지. 젠장, 이것도 성 차별이라니까, 여자 속옷이 그 지경이 되어 있었으면 금방 움직일텐데.."
"........"
"...어젠, 자는 동안 이상한 낌새는 없었어?"
"못,잤어.."
떨리는 손으로, 충격으로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처음으로 한 일은 전화를 거는 것. 경찰서 번호를 누르다가 마지막 한 개를 누르지 못했다. 뭐라고 신고해야 하지? 어떻게 말해야 해? 부끄러워. 싫어. 이걸 남에게 보이는 건 싫어. 그 와중에도 수치심을 느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는, 정말 어리석은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어. 싫어. 싫어. 어떻게 해야 하지? 패닉 상태로 굳어가는 머릿속에서 딱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베군. 아베군에게 전화를 하자.
"우리 집으로 갈래?"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안심이 되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옷자락을 잡은 내 손을 꼭 잡아준다. 택시를 타고 아베군의 집에 도착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내 집이 아닌, 다른 사람의 공간. 처음으로 그의 방에 발을 들여 놓는다. 아베군이 자취를 하는 아파트는 내가 사는 곳과 같은 원룸형식으로 문을 열자마자 그의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깨끗이 정돈된 방이 청결한 느낌을 준다. 타인의 방을 처음 방문할 때의 특유의 위화감도 섞여 있다.
"일단은 좀 자 둬. 한숨도 못 잤다며?"
"응.."
"침대에서 자. 난 여기 있을 거니까"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인다. 아베군은 내가 누워 있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소리를 작게 낮추고 TV를 시청하고 있다. 아침 방송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볍고 쾌활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가득 메운다. 눈 앞에 있는 아베군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머릿결을 만져본다. 그가 어깨를 흠칫 떨더니 "왜?" 라고 물으며 뒤를 돌아본다. 몸을 움직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깜짝 놀란 그의 눈동자가 감길 줄을 모른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져 있어. 상상하고 싶지 않은 그림이 눈을 감아도 자꾸 떠올라. 제발, 아베군.
소리없는 애원에 그가 반응한다. 침대가 두 사람의 무게를 버티는 게 힘에 겨운지 신음을 흘린다. 알지도 못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고요해진 공간은 곧 규칙적이고 은밀한 소음으로 물들어간다. 방안을 가득 메우는 열기.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 그 속에서 점점 정신이 아득해진다.
희미한 웃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또다시 TV가 켜져 있고, 방안엔, 아무도 없어.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아베군은? 손끝이 떨려온다. 어딜 간 거야?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건너편에서 다행이 아베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뭐야? 벌써 깼어?
"응, 어,디에 있어..?"
- 너 일어나면 배 고플까봐. 장 보러 나왔어. 근처에 있는 마트. 곧 갈게.
"빨,리와.."
- 응. 괜찮을 거야. 그 녀석이 내 집을 알리도 없고.
"응.."
불안하지만, 집 밖으로 아베군을 찾아 나서는 건 더 무서워. 저 문을 열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무릎을 모으고 끌어안았다. 그렇게 앉아 있으니 내 몸에서 아베군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방금까지 나를 꼭 끌어안고 있던 단단한 팔을 떠올린다.
괜찮아.
슬금슬금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베개 옆에 단정하게 개어져 있는 옷이 눈에 들어온다. 아베군이 신경을 써준 것인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회색 츄리닝 바지. 조금은 큰 흰색 면티. 재빨리 입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찌릿한 통증이 허리를 찔러오지만 곧 익숙해진다. 물, 이 먹고 싶어.. 냉장고를 열어 생수통을 들고, 싱크대로 향해 컵을 고른다. 죽 진열된 컵. 흰 바탕에 빨간색 장미가 새겨져 있는 커피잔이 눈에 들어온다. 아베군 답지 않아.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그 컵에 쪼르륵 물을 부어 마신다. 마시는 동안 눈동자가 주변을 탐색한다.
고요한 공간, 조그맣게 들리는 TV소리는 어쩐지 낯설다. 묘한 위화감. 이 방, ...어딘가 이상해..
방안을 빙글빙글 돌아본다. 이상해. 뭔가 이상해. 하지만 뭐가 이상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끝에서 끝으로 조용히 훑어본다. 흰 냉장고, 가득한 커피잔, 조그만 TV, 라디오, 가운데엔 낮은 테이블, 그 위엔 리모콘이 있다. 창문 앞에 침대의 머리끝이 맞춰져 있다.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침대. 그리고 흰 커튼. 조그만 서랍장, 옷걸이, 거울, 액자. 이상할 건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한다.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
순간, 딩동하고 초인종이 울린다. 흠칫 몸이 떨렸다.
오도독, 오도독, 두드러기가 돋아 날 것 같은 감각, 소름끼치는 감각.
"누,구세요...?"
"나."
안심되는 목소리. 쪼르르 달려가서 문을 열어 품에 안긴다.
"왜 그래?"
"무서웠.."
"나 참."
유일하게 도움을 주는 그의 팔이 나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 뒤통수를 쓰다듬어 준다.
"미하시, 무거워"
아베군이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간다. 나,나도! 라고 말하며 뒤 따라간다. 화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질척하게 나를 감싸오는 위화감. 이,상해. 무서,워.. 하지만 어째서..? 아베군이 옷을 벗고 물을 틀어 샤워를 한다. "이리 와" 꼭 주문에 걸린 사람마냥 힘 없이 휘청휘청 걸어 그를 향한다. 여전히 계속 되는 탐색. 하지만 역시나 뭐가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어. 왜 이렇게 추운 거지? 아베군을 꼭 끌어안는다.
"아직도 무서워?"
두려움에 떠는 내 눈동자를 마주 보더니 입을 맞춘다. 아베군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순간 눈을 꼭 감았다.
아베군, 아베군! 내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미하시.."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서 속삭인다. 미하시, 미하시. 작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몸 구석구석 남아 있는 미미한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그와 몸을 섞는다. 샤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어째서인지, 시끄러워. 몸이 뜨거운데 한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공간, 시끄러워. 샤워기를 꺼버리고 싶다......
축 늘어져 있는데 아베군이 나를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조심히 눕혀준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준다.
"너 이젠 진짜 누워 있어. 유혹하지 마. 알았냐? 밥 해줄테니까."
요리를 하는 그의 등을 쳐다보며 침대 위에 앉아 있다. 리모콘을 들어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내 얼굴, 혹시 빨갛나?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본다. 음, 괜찮아.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조금 연다. 벽을 더듬어 가던 시선이 액자에서 멈춘다.
우리 집과는 다른 그림.
시선이 그림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위화감이, 머릿속을 점령해 간다. 커텐을 쥐고 있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한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흐른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미하시? 뭐해?"
아베군의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온다. 천천히 그를 쳐다본다.
아베군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서 있다.
"거기서 뭐하냐?"
"....."
"밥 먹어"
가운데엔 테이블이 놓여 있고, 마주하는 벽엔 TV가, 그 옆엔 서랍장, 서랍장 위에는 라디오, 그 위로 액자가 벽에 걸려있다. 방구석엔 옷걸이, 창문 앞엔 침대, 침대 옆엔 냉장고, 싱크대 위엔 커피잔이 다섯 잔, 물컵이 두 개, 혼자 사는 것 치곤 묘하게 많은 수다. 식탁 위에는 꽃병대신 작은 선인장 화분. 화장실을 가득 메우던 라벤더향 방향제.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어. 분명 처음 오는 방인데, 모든것이 손에 익숙하다. 그것이 부른 위화감.
여기, .....내 방이랑 똑같아.
"밥 먹으라니까.."
까슬하게 신경을 긁는 목소리.
그의 얼굴이 달팽이 등껍질 처럼 뱅글뱅글 일그러진다.
달팽이, 축축해, 미끄러워, 기분 나빠.
공간이 정적과 함께 무겁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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