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19~2007/12/02)
(1)
1.
시끄럽게 울어대는 자명종 소리에 쥰타가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머리를 내밀었다. 밤새도록 잠을 설치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든 탓에 무거운 머리를 감싸 쥐며 억지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씻고, 양치를 하고, 대충 고른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날씨도 우중충해서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오늘은 새로운 근무처의 첫 출근 일이다.
회사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을 보았다. 야구를 하는 아이들인지 손엔 각자 글러브를 들고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려야 할 역에서 사람들에 밀려 고생을 좀 하고 회사에 도착했다. 지정받은 부서에 가서 잠시 인사를 나눴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인사하고 얘기를 듣고 하는 것이 영 불편하고 짜증이 나는 쥰타였지만 차마 그것을 표정으로 나타낼 순 없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소비하고 있을 때였다. 낯익은 얼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쥰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흘깃 돌아보더니 옆에 앉은 직원과 뭐라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어찌 됐든 좋았다. 눈에 띄게 경직된 자세로 그를 보고 있었더니,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여직원이 조그맣게 설명해 준다.
"눈에 띄죠? 저 사람 우리 부서도 아닌데 종종 놀러 와요. 옆 부서에 있는 하루나 모토키씨라고.."
역시.
왜 그가 여기에?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두 배가 되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실수만 할 것 같다.
쥰타의 예상대로 종일 실수만 반복되었다. 겨우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니, 역시나 그를 배려해주려는 건지 몇몇 사람들이 같이 점심이라도 하자고 쥰타를 꼬드겼다. 쥰타는 사람들 틈을 벗어나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거절하고 빵과 우유를 사서 회사 옥상으로 향했다.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직 추운 날씨가 그를 도왔는지 적막함이 그를 반겼다. 벽에 기대앉았다. 눈을 감으니 왠지 졸음이 쏟아진다.
이대로 조금만 쉬자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그 휴식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떠 주변을 살피니, 시야엔 사람의 실루엣이 잡혔다. 조그맣게 불평을 하고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는데 그 실루엣의 주인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쥰타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세에 놀라 시선을 옮겼다. 존재를 확인하고 숨을 삼켰다. 쥰타의 앞엔 하루나 모토키가 서 있었다.
"너 아침에 나 이상하게 쳐다보던... 맞지?"
설마 이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쥰타는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를 이곳에서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루나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쥰타를 괴롭게 만들었다.
"나 알아?"
쥰타의 시선에 위화감을 느꼈는지 하루나가 더 바짝 다가왔다. 쥰타는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니오... 아침엔. 그냥.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내가 그렇게 눈에 띄었나?"
충분히 눈에 띄는 외모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굉장한 기세로 쥰타를 사로잡았다.
하루나.
하루나 모토키.
동경해 마지않던, 투수였다.
아직 학생일 때, 잠깐 하게 된 야구가 쥰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하루하루가 무료한 그에게 있어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열중하게 만든 것은 그때뿐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언제나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선배 카즈키와 멤버들, 마운드의 흙냄새, 그라운드의 열기는 졸업을 하고 나서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하루나가 있었다.
하루나를 처음 본 날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변했다. 마운드에 서 있는 하루나의 존재감에 위축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자신을 느꼈다. 언젠간 저 선수와 겨뤄보고 싶다. 언젠간 같은 마운드에 같이 서고 싶다고 갈망했다. 하지만 결국은 졸업하는 날까지 같은 시합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졸업 후에는 하루나의 소식을 일부러 찾아 볼 정도였지만 귀에 들어오는 소식은 없었다. 그러나 하루나라면 당연히 프로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년 후엔 분명히 그의 소식을 바라지 않아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다. 그가 있는 세계는 프로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납득이 가지 않는 쥰타였다.
하루나가 원망스러웠다.
"아, 처음 보는 건데 갑자기 반말해서 미안. 혹시 기분 나빴다면..."
"...신경쓰지 않습니다. 어차피 같은 나이니까..."
하루나가 커피를 마시려다가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쥰타를 보았다. 쥰타 역시 빵을 한입 베어 물고 마주 보았다. 하루나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싱긋 웃는다. 반응이 이상해서 얼떨떨해하고 있자 하루나가 커피를 다 마시곤 들고 있던 캔을 휴지통을 향해 던져버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시원하게 골인하는 그것에 순간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너도 말 놓지 그래?"
"...전 이게 편해요."
"그래? 그럼 말고."
"...."
"근데 너, 아직 소속된 서클 같은 거 없지?"
"에?"
대화의 화제가 갑자기 변하여 쥰타는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 이 회사 야구팀에 소속해 있거든. 아 물론 그냥 취미가 맞는 사람들끼리 하는 그런 평범한 팀인데, 너도 들어올래?"
"....."
"아니 뭐, 나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권유하는 거 찜찜하긴 한데 회원 끌어오라고 협박이 들어와서..."
쥰타가 별 대답이 없자 하루나는 그가 이해를 못 했다고 생각했는지 한 번 더 설명을 해준다.
"그러니까, 음... 동호회? 그런 거야. 가끔 시간 날 때나 그러니까 주말 같은 때......"
"시간 없습니다."
"....어. 그래?"
쥰타는 아직 반이나 남은 빵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곤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에 주저앉았다. 왠지 한숨이 나왔다.
쥰타에게 있어 가장 빛나던 시절은 이미 추억이 되어 있었다. 추억은 빛이 바래서 이젠 꿈에서나 가끔 볼 뿐이었다. 현실에 치어가며 별다른 의욕도, 재미도 느끼지 못한 채 시간에 떠밀려 이곳까지 오고 말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추억'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만나고 말았다. 하루를 그냥저냥 흘려보내며 살아도, 가슴 한구석에선 ‘그’가 언젠간 신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그날을 꿈꾸고 있었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쥰타에게 있어 가장 큰 위안이었다. 그런데 그랬어야 하는 그가, 자신과 같은 세계에 있다. 이유 모를 쓸쓸함이 쥰타를 감싼다.
하루나라면 자신이 가지 못했던 길을 걸어가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와는 아무런 접점도 가지지 못했지만, 그가 프로가 된다면 자신의 청춘도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흙냄새가 나는 마운드였다. 이런 차가운 바닥이 아니었다.
일을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하루가 끝나버렸다. 퇴근을 하고 회사를 빠져나오며 깊고 큰 한숨을 뱉어내는 쥰타였다. 묵묵히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회사를 본다. 나는 이곳에서 잘해낼 수 있을 것인가. 또 한 번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따뜻한 온기가 쥰타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작은 충격에 끌려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놀란 쥰타가 상황을 이해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아주 익숙한 등이 쥰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존재가 자신을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뭐..뭐야? 이거 놔!"
상황 판단을 끝낸 쥰타가 허둥지둥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그 존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쥰타를 보며 웃기만할 뿐,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장성한 남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시내 한복판을 뛰어가는 모습은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쥰타는 그 시선이 너무 부담스럽고 부끄러웠다. 고개를 푹 숙이고 끌려가듯 마지못해 뒤따르는데,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드디어 멈춰 선다.
숨을 헐떡이며 하루나를 쳐다보았다. 하루나도 조금은 숨이 흐트러져있었지만 쥰타 만큼은 아니었다. 그 차이가 참을 수가 없는 쥰타였다. 하루나가 무리하게 끌고 온 곳은 구석진 곳에 존재하는 배팅센터였다.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인 듯 가볍게 일상 잡담을 나눈 하루나가 돈을 지불하고 겉옷을 벗어 맡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해야 할 줄 몰라 당황해 하고 있었더니 하루나가 눈짓으로 가까이 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루나는 가볍게 배팅 연습에 들어갔다. 쥰타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하루나의 게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을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하루나가 시원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너도 한번 해 볼래?"
"아니, 됐어."
그 대답에 하루나가 흐응~하며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자판기 근처로 가버렸다. 쥰타는 그의 등을 한번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방금까지 하루나가 배트를 휘두르고 있던 지점을 보았다. 배트가 아니라 공을 던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하루나는 자기를 왜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일까.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 얼떨떨할 뿐이었다. 넋을 놓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운 것이 뺨을 스치는 바람에 흠칫하고 몸을 떠는 쥰타였다. 하루나가 킥킥거린다. 들고 온 음료수를 건네며 쥰타의 옆에 역시나 털썩하고 앉는다.
"너 말야, 자꾸 그렇게 흠칫흠칫 떨지 좀 마. 뭐래야 되나... 귀엽다...? 가 아니라, 재밌으니까."
정말로 재미가 있는지 눈동자에 장난기를 가득 품은 하루나가 쥰타를 쳐다보았다. 자기가 끌고 와 놓곤 아무 설명도 없이 혼자서 배트를 휘두르더니 이젠 사람을 놀리기까지 하는 하루나를 쥰타는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대체 나를 왜 여기에 데리고 온..."
"너 나 알지?"
여전히 싱글거리며 물어왔지만 그 한마디에 깜짝 놀라 또다시 경직되고 마는 쥰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더니 하루나의 커다란 손이 쥰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행동에 쥰타가 눈을 크게 뜨고 깜박였다.
"뭐 딱히 거짓말 했다는 것에 화를 내는 거 아냐. 그러니까 겁내지 마."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멈추더니 "내가 널 여기에 데리고 온 건 그냥. 충동적이었어. 앞에 네가 보이기에 그만." 하고 대답하는 하루나였다. 사람을 무리하게 끌고 와 놓고 '그냥' 이라는 한마디로 끝내다니....... 발끈하는 쥰타였지만 화를 낼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근데 날 어떻게 아는 거야? 난 아무리 생각해보려 해도 네가 기억에 없어서 말이지..."
"고등학교 때, 야구 했었으니까."
쥰타의 체념 섞인 대답에 하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정말? 무슨 학교?"
쥰타가 뜸을 들였다. 생각해보니 상대방은 자신을 모르는데 혼자만 상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금 뜸을 들인 후 '토세이' 하고 대답했더니 하루나가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 듯 허공을 바라보다가 '아하!'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의아해 하며 쥰타를 쳐다보았다. 하루나의 대답은 쥰타의 기를 꺾어 놓기에 충분한 대답이었다.
"네가... '그' 타카세 쥰타냐??"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이 쥰타를 더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괜히 화가 나서 어느새 속이 빈 음료수를 들고 벌떡 일어서지만, 일어섬과 동시에 하루나가 끌어당겨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아, 미안. 아니, 나는 그다지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무안해진 쥰타가 얼굴을 휙 돌렸다. 쥰타의 심통이 난 뒤통수가 왠지 귀엽게 느껴져서 하루나는 그만 키득대고 말았다. 그 키득거림이 쥰타의 신경을 긁어 놓았지만 하루나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키득거리더니 "그렇구나" 하고 말하는 하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날 알고 있었구나..."
그 목소리엔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당신, 왜 여기 있는 거야? 솔직히 난 좀 놀랐다고. 당연히 프로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분위기에 끌렸던 걸까, 계속 속에만 담고 있던 질문을 드디어 꺼내 보았다. 하루나는 쥰타의 그 한마디에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는 듯 산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화가 난 거였나?"
그 대답에 또 한 번 당황하는 쥰타였다. 아까부터 자꾸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별로, 화난 건 아냐. 그냥, 뭐랄까 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뭐, 여기 있는 이유는 간단하지. 프로가 될 수 없었으니까."
"뭐?"
"어째서 다들 그런 반응을 하는지 모르겠네. 정말이야. 될 수 없었어."
"거짓말."
멍하니 대답하는 쥰타의 얼빠진 표정을 보면서 하루나의 입가엔 미소가 자리 잡는다.
"정말이라구."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하루나는 벤치에 두 팔을 걸치고 기댄 채 입을 떼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어리석었던 거지. 그때의 난 단순했어. 그냥 내가 즐길 수 있는 야구가 하고 싶었을 뿐이었거든. 프로가 되면 평생 야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프로가 되기 위한 이유는 그것뿐이었어. 근데 프로는 그게 아니더라고. '즐길 수 있는' 야구가 아니었던 거야. 난 그 사실에 실망했고, 야구만 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나를 옭아매는 것들이 싫었어. 난 그냥 자유롭게 야구가 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어.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걸로 떼돈을 벌고 싶지도 않았고. 나를 죽이면서까지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고 싶지 않았던 거야."
하루나가 고개를 숙였다.
"한마디로, 어렸던 거지."
그의 시선이 쥰타의 눈동자를 향했다.
"어리석고, 건방졌던 거야."
그 시선에서 쥰타는 깨달았다. 하루나도 자신과 똑같았다. 지나버린 과거를 후회하고 그리워하는, 쓸쓸함과 허전함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뭔가 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루나도 쥰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여 그저 그렇게 침묵할 뿐이었다. 몇 분이 지나고 하루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 회사에 있고, 야구동호회에 소속돼 있다는 거야. 결국은 벗어날 수 없었던 거지. 지금은 완전 후회하고 있어. 살다 보니까 돈이란 게 또 엄~청! 중요한 거더라고. 그냥 고집 좀 꺾고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공만 던졌음 지금쯤 야구도 계속하고 있었을 거고 돈방석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쥰타가 그의 농담 섞인 푸념에 실소를 터트렸다. 그 모습에 하루나가 순간 놀라는가 싶더니 어째선지 시선을 피하곤 뒤통수를 긁는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쥰타에게 왼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된거야.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쥰타는 사양 않고,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쥰타는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쥰타의 기억 속에 있던 하루나는 그야말로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힘든 현실에 부딪혀 언제까지 꿈만 꾸고 있던 자신이 만들어 낸 도피처에 불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계속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현실을, 지금 눈앞에 닥친 이 상황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커다란 벽을. 그저 빛나고 따뜻했던 과거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하루나 모토키'라는 환상에 기대어...
쥰타는 지금 자신의 앞에 선,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남자를 본다. 처음엔 이 남자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굉장히 화가 나고 참을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행운처럼 느껴진다. 현실을 벗어날 수도,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는, 무능력한 존재는 현재를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제 더는 어리광은 부리지 말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 가며 살아야 한다. 눈앞의 이 남자가 그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실어보았다. 하루나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쥰타가 씨익 웃으며, "고마워" 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순간 하루나의 눈이 커지더니, 다시 가늘어진다.
불안하던 회사 일도 하루가 지났다고 어느새 조금은 익숙해져 있는 자신이 신기한 쥰타였다. 정신없는 틈틈이 그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하루나를 찾았지만, 오늘은 한 번도 그의 부서에 얼굴을 내미는 일이 없었다. 하루나를 찾지 못했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쥰타였다.
점심시간에 발걸음이 저절로 옥상을 향했다. 사실 조금은 그곳에 하루나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쥰타는 애써 그 생각을 무시하고 있었다. 일부러 비상계단으로 오르고 있는데 위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장이 고동치는 쥰타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 그 끝엔 역시나 하루나가 서 있었다.
"어라?"
순간, 부끄러워져 쥰타는 시선을 피했다.
"점심 먹으러 가는 거야? 아깝다. 난 방금 다 먹고 내려오는 길인데..."
하루나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곁을 지나쳤다. 스쳐 지나가는 하루나의 등이었다. 겨우 만났다. 라는 생각이 앞선다. 부정하려고 해도 온종일 그와 만나길 바랐던 건 사실이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발소리에 초조해진 쥰타가 다짜고짜 하루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하루나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응?" 하고 대답하는 그에게 쥰타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당황해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쥰타를 보더니 하루나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루나가 다가올수록 왠지 진정이 되지 않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는 쥰타였다.
"왜?"
"그러니까...."
당황해 하는 쥰타의 모습에 하루나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지만, 미처 그것까지 눈치 채진 못했다.
"그러니까... 저기... 나 들어가 볼까 하고.. 그... 동호회...?"
"아~ 오케이. 완전 대 환영이라니까. 근데 너까지 들어오면 우리 팀 완전 무적이겠는데?"
"그..럴려나..."
"그렇다니까. 그렇다니까."
하루나의 손이 쥰타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다가 떨어졌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가 손을 두세 번 흔들더니 또다시 멀어진다. 더 이상은 잡아 둘 이유도 없었기에 그저 시무룩하게 뒤돌아서는 쥰타였다.
"쥰타!"
갑자기 등 뒤에서 하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쥰타는 불린 자신의 이름에 놀라며 돌아보았다.
"난 말이야.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 못되거든? 근데 넌 이상하게 안 잊힌다. 어젯밤에도 하루 종일 네 얼굴만 둥둥 떠다녀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하루나가 웃었다.
"네 웃는 얼굴이 말이야. 꿈에서도 나와서 힘들었어."
그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곤 등을 휙 돌려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쥰타는 가만히 있다가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벽에 기대었다.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하루나의 발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쥰타는 사라져 가는 그 발소리를 들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못 잔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2)
2.
오늘까지 이거 다 끝내야 하는데...
쥰타는 일거리를 눈앞에 쌓아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오늘 안으로 못 끝낼 양도 아니었지만 지금 쥰타의 옆에서 턱을 괴고 앉아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하루나라는 존재가 신경이 쓰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지경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 용무도 없어 보이는 그는 자신의 부서가 아님에도 자연스럽게 사무실 풍경 속으로 녹아들었다.
어째서 아무도 주의를 주지 않는 거지?
그런 의문이 드는 쥰타였지만, 그의 존재감에 다른 사람들도 선뜻 다가올 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또다시 작게 한숨을 쉬려는 찰나, '아얏!' 하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았더니 하루나가 누군가에게 귀를 잡혀 어정쩡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너 인마, 네 일은 다 끝내고 여기 와 있는 거야? 엉? "
하루나의 귀를 끌어당겨 세운 사람은 하루나가 야구를 그만두고 백수로 방황하고 있을 때 이 회사를 소개해주었다는 그의 학교 선배이자 지금은 쥰타의 부서 선배인 카구야마였다. 하루나는 카구야마에게 붙잡힌 귀가 정말로 아픈 건지 아니면 엄살인 건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무리하게 잡아떼고 있었다.
"다 끝났다고요. 나 참, 다 끝내고 노는 거니까 냅둬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쥰타의 옆에 슬그머니 앉으려던 참이었으나 여지없이 카구야마에게 다시 귀를 붙잡히고 말았다.
"으악 아프다니까!!"
"넌 끝났을지 몰라도 우린 바쁘다고! 괜히 우리 후배 괴롭히지 말고 네 자리로나 가!!"
"아윽 아파! 아프다고 알았으니까 좀 놔요 제발!"
하루나가 발을 동동거리며 사정했고 카구야마는 혀를 한번 쯧 차곤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카구야마의 등을 살짝 노려보던 하루나가 자신과 카구야마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쥰타에게 몸을 숙이더니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전에 얘기했던 '그거' 있잖아. 내일 모임 있거든? 아침 10시까지 우리 회사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알지? 거기로 나오면 될 거야"
그 얘기를 왜 굳이 귓속말로 속삭이는지 의문인 쥰타였지만 별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빨리 하루나를 보내고 일에 열중하고 싶은 기분에서다.
저항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쥰타를 보며 하루나가 웃더니 '그럼 내일 보자.' 고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고 퇴장했다. 왜 굳이 머리를 쓰다듬었는지 또 의문이 생겼지만 눈앞에 쌓여 있는 서류를 보는 순간 그런 하찮은 의문 따위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사회인이 된 후로 일요일에 아침부터 일어나긴 상당히 오랜만이라고 느끼며 쥰타는 쾌청한 아침을 만끽 중이었다. 어째서 휴일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코스를 이동해야 하는지는 불만이었지만 오늘 있을 야구 연습을 생각하면 살짝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야구 연습이라곤 해도 그야말로 취미가 맞는 직장인 몇 명 모여서 가볍게 몸을 풀어준다는 정도의 의미밖엔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들뜨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나는.
학교에 도착해보니 하루나를 비롯해 이미 몇 명의 인원이 집합해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늦었나 싶어 시계를 보았으나 아직 15분이나 남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하루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가 곧 쥰타를 발견하곤 벌떡 일어나 뛰어왔다.
"왔어? 오~ 안 늦었네?"
하루나가 쥰타의 앞을 막더니 흘끗 시계를 보고 진심으로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늦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 그렇게 약속시간 함부로 어기진 않아."
"아니 뭐, 너 여기 들어오는 거 망설였잖아. 어쩌면 안 오진 않을까도 했는데 이렇게 빨리 온 걸 보면 꽤 기대되나 봐?"
하루나의 대답을 듣고 들떠서 조금 일찍 집을 나섰던 것이 생각나 괜히 시선을 피해 입을 삐죽였다.
왠지 이 녀석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자신이 그렇게 빈틈투성이 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눈앞의 인물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기에 자신의 잘못인지 그의 능력인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 어쨌든, 유니폼은 저기 있으니까..."
"유니폼도 있어?!"
"........당연하지. 그럼 너 그 차림으로 야구할 거냐?"
"아...."
설마 유니폼까지 마련되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신경 써서 골라 입고 온 티셔츠와 청바지를 바라보며 헛수고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툭 건드려 뒤를 돌아보았더니 웬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약간은 통통하고 키가 작은 남자가 입 언저리에 세상에 둘도 없을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아! 부장님"
하루나가 '부장님'이라고 부른 그는 이제 곧 시합 시작되니까 준비하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벤치로 돌아갔다. 쥰타가 부장? 하고 되묻자 하루나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 클럽 회장님이기도 하고, 내 공을 받아줄 포수이기도 하지."
"...어?"
당연하게도 하루나는 공을 던지나 본데, 하루나의 '그' 공을 저 남자가 받는다는 건가 하는 생각에 벤치에 있는 그를 보았더니 여전히 그는 따뜻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젊어 보이는 몇몇 사원들에게 물이나 음료수 같은 것을 챙겨주며 허허 하고 웃고 있었다. 쥰타는 그 광경을 보며 자연스레 잊을 수 없었던 하루나의 속구를 떠올렸다.
'죽는 거 아냐? 저 사람.....'
그런 쥰타의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던 건지 하루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토해냈다.
"푸하하하, 너 지금 표정 끝내준다 카캬캬캬캬"
남들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큰 소리로 그렇게 한참을 허리를 구부러트리며 웃더니, 어느새 눈에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훑어낸다. 쥰타는 괜히 머쓱해져서 뒤통수를 긁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며 하루나가 놀리듯 입을 열었다.
"넌 있는 힘껏 던질 생각이냐? 제발 좀 봐달라고."
"그런 거 아냐!"
"됐으니까. 옷이나 갈아입어."
하루나에게 떠밀려 벤치로 향하는 쥰타의 등 뒤로 또 한 번 그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대충 드리워진 커튼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꽤 인원이 모여 있었다. 우리 회사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싶은 마음에 신기해하고 있는데 예상하고 있던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왜? 누구 찾아?"
어느새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하루나가 한 손에 야구공과 글러브를 들고 나타났다. 유니폼 차림의 그를 보는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히는듯한 기분이었지만, 그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아, 응. 카구야마상은?"
"아~ 그 선배는 없어. 안 해"
"....그렇구나."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돌아오는 대답에는 잠시 놀랐지만,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쥰타였다. 자신도 처음엔, 야구는커녕 야구장 근처에도 다시는 가지 않으려고 했었으니까. 분명 하루나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일은 평생 없었을지도 모른다.
야구 경기라곤 해도 역시나 아마추어들의 집단이었던 만큼 가볍게 운동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들의 실수투성이 경기모습에 피식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쥰타였다. 하루나도 스피드라거나 파워라곤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수준의 공만 던졌지만 그 공도 쳐 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젠 오히려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이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이 회사 내 동아리로써 떳떳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쥰타는 오랜만에 느끼는 세계에 잠시 마음이 풀어지는 듯도 했지만 하루나의 공을 보고 있자니 그가 정말로 저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갑자기 하루나가 마운드에서 내려와 쥰타에게 공을 건네준다.
"지금부턴 네가 던져"
"뭐?"
"벤치에 앉아 있으려고 온 건 아니잖아?"
쥰타는 그 말에 마지못해 공을 건네받고 마운드에 올라섰다.
마운드 위에서 하루나를 쳐다보자 그가 손을 한번 흔들어주더니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쥰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오히려 긴장한 쥰타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곤 힘을 주어 공을 쥐어보았다. 그러자, 긴장감이나 부담 같은 것이 사라지며 어디서 오는지 모를 편안한 기분에 주변 공기가 바뀌기라도 한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쥰타는 그제야 깨달았다. 빠른 공을 던진다든가, 변화구를 던진다든가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구나, 하루나는, 정말로 즐거웠구나.
아마도 하루나는 이 자리에서 몇 차례 공을 던지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굳이 큰 대회가 아니더라도, 프로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더라도, 공만 던질 수 있다면... 우린 그만큼 단순하고 어쩔 수 없는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모인 많은 사람도 크게 다를 것 없다. 쥰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아주 오랜만에 포수의 미트를 향해 공을 던졌다.
아침 운동이 끝나고 사람들과 모여서 점심을 먹고, 또 그 무리에게 이끌려 아직 대낮임에도 술자리까지 이동했다. 평소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행위 자체를 꺼리고 있던 쥰타라 약간 낯설기도 했지만 옆에는 하루나가 있어주었기에 끝까지 어울렸다.
물론 하루나도 쥰타도,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쥰타로써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쥰타가 하루나에게 너는? 하고 물었더니 그가 드물게도 얼굴을 붉히며 나 술 못해 라며 고백해왔다. 그런 하루나의 모습을 잠시라도 귀엽다고 생각했던 쥰타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고 자신을 나무랐다.
그렇게 한참을 그들과 어울리다가 나오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침엔 운동 점심엔 술, 그리고 저녁엔 일찍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겠다는 건가. 그들의 그런 터프함이 쥰타한테는 이해도 안 가고 어이도 없었지만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건 사실이었으니 더 이상의 불평은 하지 않고 헤어졌다.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하루나가 불러 세웠다. "나하고 한잔 더 하자." 하고 말한다. 그러면서 고갯짓으로 벤치 옆의 자판기를 가리킨다. 술 냄새 때문에 속이 거북해져 있던 쥰타는 순순히 그를 따랐다. 벤치에 앉아 하루나가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단맛이 강했지만, 어째선지 피로가 가시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쥰타, 저기 좀 봐."
하루나가 가리킨 곳은 하늘이었다. 뭘 보라는 거지? 갸우뚱하자, 하루나가 훗 하고 코로 웃으며 '노을'이라고 대답했다. 쥰타가 다시 하늘을 보자 하늘 전체에 저녁노을이 깔려 꽤 화려한 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굉장하군, 하고 생각은 했지만 해가 지면 노을이 깔리는 건 당연한 이치이기에 그것에 별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아름답지 않냐? 난 하루가 끝나는 이때 즘이 제일 좋아."
하루나답지 않은 감상이라는 생각에 한마디 거드는 쥰타였다.
"로맨티스트군. 답지 않아."
"너 모르냐? 남자는 말이야. 이 나이가 되면 다 로맨티스트가 되는 거라고."
"웃기고 있네. 난 전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데?"
"넌 불감증"
"이...!"
하루나의 농담에 순간 진심으로 반응했던 쥰타였지만 그가 어느새 자신의 볼을 꼬집곤 키득거리기에 어이가 없어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왜 남의 볼은 자꾸 꼬집어 대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쥰타였지만 별 반응은 하지 않았다.
아아 그래. 마음대로 놀려. 오늘은 봐주지. 덕분에 즐거웠으니까.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는 하루나를 흘끗 훔쳐보곤 남은 커피를 비우려는데, "쥰타."하고 부르는 하루나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쥰타의 고개가 그를 향했다.
갑자기 가려지는 시야와 순간적으로 덮쳐오는 뜨뜻미지근한 감촉에 쥰타는 깜짝 놀라 경직되어 버렸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아 그렇게 한참을 얼어붙어 있다가 머릿속 정리가 끝났을 때 즘 얼굴이 확 붉어지며 그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너!!! 지금!!!"
마시다 남은 캔 커피가 땅바닥을 굴렀지만 그런 것은 이미 상관없었다.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이 현실이었나? 싶을 정도로 믿기지가 않았지만 감촉만큼은 아직도 따뜻하게 자신의 입술에 남아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감촉이 느껴지는 한 실제로 일어난 일. 당황한 채 서 있는 쥰타에 비해 하루나는 방금 무슨 일 있었나? 하는 시선으로 쥰타를 보았다.
"대체 지금 무슨 짓을... 아니 갑자기 왜??!"
쥰타의 질문에 하루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그냥 갑자기 하고 싶었어."
너!!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같은 말로 두 번이나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하고 대답해 주고 싶은 쥰타였으나 너무나도 어이없는 하루나의 대답에 말문은 막히고 그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하루나를 가리키며 무언의 항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쥰타의 모습을 빤히 보던 하루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손등에도 해주랴?"
"히익!!"
쥰타가 냉큼 손을 등 뒤로 숨기고 하루나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다. 고작 한 발자국 가지고 될 일은 아닌 거 같았지만 쥰타는 지금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반대로 하루나는 현재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씩씩거리며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쥰타가 정말 불쌍할 정도로 우스워 보여 미칠 것만 같았다. 솔직하게 웃고 싶었지만 하루나도 자신이 한 일에 자각은 있는지 애써 참아가며 일어섰다.
역시나 비워진 캔 커피는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고 (물론 깨끗하게 골인), 쥰타를 향해 큰 걸음으로 걸어가니 쥰타는 딱 그만큼 멀어진다. 하루나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쥰타를 불렀다.
"안 해. 안 하니까 도망가지 마"
쥰타의 두 눈동자는 그 말을 어떻게 믿냐며 항의했지만 발걸음은 멈추어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난 그게, 난 네가 좋아"
"뭐.....?"
"나랑 사귀지 않을래?"
"취했냐?!!!!!!! 술도 안 먹고 취했냐!! 정신이 나간 거 아냐?!!"
일말의 주저거림도 없이 튀어나온 쥰타의 대답을 보아하니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가 보다. 하루나가 한숨을 푹 쉬며 쥰타의 어깨를 잡았다. 순간 흠칫하는 떨림이 느껴졌지만, 뭐, 당연한 반응이다.
"취하지도 않았고, 사실이라고."
"그럼 뭐야. 너 변태냐?"
"아니 그러니까....."
하루나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간에 주름이 약간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쥰타가 더 긴장을 했다.
"너 근데 엄청 실례다. 내가 너 좋아한다는데 왜 변태소릴 들어야 해?"
"........갑자기 좋다는데 그걸 누가 믿냐?! 너 나 놀리는 거지???"
"...거 참, 승산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의 쥰타의 반응을 봐도 그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뻔했기에 하루나는 지금 이렇게 까지 놀라며 당황하는 쥰타의 반응이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 좀 빨랐던 건가? 하고 뒤늦게 후회해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는 일단 쥰타를 진정시키고 제대로 된 대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쥰타를 보고 있자니 어째서일까. 왜 그를 놀리고 싶어지는 걸까. 하루나의 입꼬리는 자꾸 올라가고, 어느새 눈동자엔 장난기가 가득 이다. 쥰타가 순간적으로 그것을 느꼈는지 하루나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어깨를 틀었다. 하지만 하루나의 손아귀의 힘은 더 세지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 당장 대답하라곤 안 해. 한 일주일 주면 되겠냐?"
하루나가 한걸음 다가섰고,
"평생을 줘도 안 돼"
그만큼 쥰타가 뒷걸음질 친다.
"너 자꾸 이러면 회사 생활 힘들어질 텐데"
또 하루나가 한걸음 다가섰고,
"회사 옮기면 그만이야."
쥰타가 또 뒷걸음질이다.
하루나가 여유만만하다는 표정으로 쥰타를 내려다보며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쥰타는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고 느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도망을 쳐야 한다.
"넌 이미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어"
"없긴, 뭐가 없어!"
쥰타가 온 힘을 실어 하루나의 무릎을 걷어찼다. '으악!'하는 소리와 함께 하루나가 나뒹굴었지만, 그의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쥰타는 지금 자신의 신변의 안전이 우선이라 생각하며 그 자리를 벗어나 달렸다.
"저 미친 놈..."
달리면서도 계속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렸다. 정말 술 냄새만으로 취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 눈동자는 취한 사람의 눈동자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강렬하고 맑았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가빠져서 잠시 발을 멈추고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혹시라도 하루나가 따라온 건 아닐까 싶어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그는 보이지 않았다. 쥰타는 숨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하루나가, 나를 좋아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자신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 걸까. 당장에 내일 만날 그를 어떻게 대해야 좋단 말인가. 도망가고 싶어도 그래 봤자 회사 안이다.
웃기지 마. 나도 남자다.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어!
쥰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또다시 떠오르는 감촉에 입술을 살짝 쓰다듬던 쥰타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남자에게 입맞춤을 당했다. 싫어야 한다. 분명히 기분 나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도 가장 먼저 가슴 한구석에서 낯익은 감각이 깨어남을 느꼈다. 한 때, 이렇게 가슴이 간질거리던 때가 있었다.
"말도 안 돼"
쥰타는 휘청거리며 걷다가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은 생각하지 말고 샤워를 하고 잠이나 자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의 얼굴과 미소,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가, 뚜렷하게 조각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 하루나가 부르던 자신의 이름은, 정말이지 따뜻한 어감이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쥰타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굴러다녔다.
"젠장...."
오늘도 잠은 다 잤다.
(3)
3.
쥰타...
잠결에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음성이 아득해서 약간 이마를 찡그렸다.
쥰타...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 보려고도 했지만 쉽사리 잠이 깨지 않는다. 으음... 하는 신음소리를 뱉어내고 계속 자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음성이 귓가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어째선지 가슴이 죄어오는 기분이다.
쥰타, 왜 그래? 힘드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흠칫 놀랐다. 이것은 꿈인가? 아니면 누군가 정말 이 방에 함께 있는 걸까?
얼른 일어나서 확인을 해보고 싶은데,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 마음이 안정된다.
쥰타...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이 목소리, 그래, 생각이 났다. 하지만 어째서 그가 이 곳에...?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도,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도 멀어져 간다.
눈을 뜨기도 전에 주륵 하고 눈물이 먼저 흘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쥰타가 입을 연다.
".......카즈상."
멍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테이블에 탁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엔 따뜻해 보이는 커피 한잔이 놓여 있다. 시선을 옮겨 보니 카구야마가 싱긋 웃는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아..."
"괴롭히던 녀석이 안 오니까 심심해?"
"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반문했더니 커피를 홀짝이던 카구야마가 의외라는 시선으로 대답했다.
"하루나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하루나가 오질 않는다. 분명히 어제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하루나를 어떻게 피해 다닐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나 했더니, 이번엔 꿈에서 카즈키가 나왔다. 하루나의 잔상은 그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꿈에 나온 카즈키가, 꿈속에서 들려오던 그 음성이, 그 손길이,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 한없이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웬일로 안 오는 걸까요."
대충 장단을 맞추듯 대답했지만 확실히 이상하기도 했다. 이것도 하나의 작전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루나라면 분명 가능한 일이다. 하루나는 어딘지 모르게 사냥꾼을 연상시킨다. 덫을 놓고 기다리는 일쯤은 여유일 것이다.
"그 녀석 출장 갔어"
"네?..."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끌려갔거든. 어찌나 시끄럽던지 일찍 출근한 애들은 다 봤다니까.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복도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데, 오늘은 안돼!! 오늘만큼은 안돼!! 라니, 뭐가 안된다는 건지.. 크큭.."
".....출장을 끌려가기도 하나요?"
하루나가 출장을 갔다는 것보다도 아침 일찍 출근한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갔다는 것이 더 신경 쓰이는 쥰타였다. 쥰타의 물음에 카구야마가 쿡하고 웃더니 대답했다.
"그게 아냐, 그 녀석 일은 열심히 해도, 외근이라던가, 출장이라던가, 일체 거절했거든. 그런 걸 자르지 않는 회사도 신기하지만. 어쨌든, 이번 출장도 하루나가 거절했는데 하루나가 아니면 안 될 일이라 아침 일찍 출근한 하루나를 납치한 거지. 미즈시마 부장이."
미즈시마 부장이라고 하면 야구 모임에서 만난 그 인심 좋아 보이는 아저씨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말이야. 사람이 좋아서 사원들한테 인기가 많아도 말이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냐. 이번에도 하루나를 끌고 가는데 힘들어하는 기색도 하나 없고, 얼굴엔 여전히 그 인자한 미소를 걸친 채, "알았어, 알았어"라고 타이르면서도, 꼭 개 끌고 가듯이 무식하게 끌고 가더라니까. 하루나가 그만큼 바둥거리면 힘이 들만도 한데, 무서운 사람이지. 하핫.."
개 끌고 가듯이. 왠지 풍경이 저절로 눈앞에 펼쳐지는 바람에 쥰타도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쥰타의 미소를 보자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카구야마가 쥰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오늘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열심히 일하자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쥰타의 손에는 카구야마가 건네준 커피잔이 아직도 따뜻한 온도를 유지한 채 쥐어져 있었다. 그 커피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쥰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선배. 무리일 것 같아요."
코끝을 찌르는 커피 향은 카즈키를 떠올리게 한다. 그가 안아 줄 때면 늘 이렇게 달콤한 커피 향이 났다. 누구보다 편안한 사람. 언제나 내 앞을 막아서고 나를 지켜주던 사람. 참으로 따뜻하게 웃던 사람. 카즈키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가 좋았다. 그 따뜻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웃는 것이 좋았다.
"너에게 이런 감정 품게 돼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네가 좋다."
갑작스런 카즈키의 고백에 쥰타는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그 고백이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계속되 오던 질긴 인연이 지겹지 않았던 것처럼. 졸업을 앞둔 카즈키 선배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좋아한다'라는 말을 듣고 깨달았다. 가슴에 자리한 이 마음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카즈키의 졸업과 함께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긴 시간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와 함께 하는 동안 내내, 쥰타는 아직 그와 나에겐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만 생각했다. 쥰타가 주저앉을 때마다 언제나 그가 부축해서 일으켜 줄 것이라고, 그런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었다. 어리석었다.
"선...?"
카즈키가 그 얘기를 꺼낸 것은 가을의 어느날이었다. 카즈키의 집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아 영화를 감상할 때였다. 멍하니 넋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리모컨을 찾아 시끄러운 영화를 꺼버렸다.
"집에서, 멋대로 약속을 잡아 놨더라고.."
"...선배. 결혼해요?"
카즈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 너랑 사귀고 있어."
당연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쥰타가 고개를 숙인다. 힘없이 처져있는 어깨를 눈치 챘는지 카즈키가 여느 때처럼 그 어깨에 손을 두르고 천천히 자신을 감싸듯 안아 주었다.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이쯤에서 쥰타가 미소 지으며 카즈키의 등에 손을 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카즈키는 장남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이었다. 그 집에서 카즈키는 장남으로 자랐다. 그는 이미 어엿하게 한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른다. 선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집에서 슬슬 그를 몰아세우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는, 누구보다도 책임감이 강하다.
지금은 이렇게 말해도 그가 언제까지, 과연 마지막까지,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힘든 짐이 될 것인지를 쥰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사정과 성격으로 보아 우리들의 관계는 분명 끝이 존재한다고, 그것만큼은 기억하자고, 분명 처음엔 그렇게 다짐했는데...어느새 그런 다짐 같은 거 까맣게 잊고 카즈키의 품 안에서 보호받기만 하는 나날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는 쥰타였다.
".....헤어질 때가 온 건가."
품속에서 작게 속삭였더니 카즈키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 팔힘이 느껴지는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는 걸 경험했다. 울면 안 된다. 이 남자의 가슴을 눈물로 적실 순 없다. 쥰타는 카즈키의 품을 빠져나왔다.
냉장고 앞까지 걸어가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하며 돌아서서 눈가를 닦았다. 하지만 그 뒤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걸까. 내 전부였던 사람이 이젠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네가 싫다면 거절할 수도 있어."
어느새 다가온 카즈키가 갑자기 엄청난 힘으로 쥰타를 끌어안았다. 힘에 밀려 순간 주춤한다. 쥰타는 자신도 모르게 카즈키의 등에 손을 두르고 있었다. 떨리는 그의 음성이 쥰타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한 번도 쥰타에게 대답을 강요한 적이 없는 카즈키였다. 언제나 매달리는 건 쥰타의 몫이었고, 그런 쥰타의 손을 잡고 전진해 주던 사람이 카즈키였다. 많은 추억이 한순간에 스쳐가는 기분이었다. 그 많은 추억이 너무나도 짧게 스쳐간다.
"카즈상..."
"쥰타, 말해. 싫다고 말하면.."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그럴 순 없었다. 겁쟁이니까. 보잘것없는 자신 때문에 그의 인생이 뒤틀리는 건 싫었다. 책임을 질 자신도 없었고, 함께 뛰어넘을 자신도 없었다. .....그때 보았던 그의 상처받은 눈동자는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이별의 말을 건네는 것도 싫었지만, 그의 앞에서 우는 것은 더 싫어서 눈물이 나오기 전에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와 만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일 거라고 확신했다.
카즈키의 집을 나와 헤어질 때, 작게 '안녕'하고 인사했다. 카즈키는 그 말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괜한 걱정은 하지 마"하고 대답했다. 혹시라도 쥰타가 오늘 일을 신경 쓰며 살까 봐 걱정이 된 그가 덧붙인 말이었다. 카즈키는 쥰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쥰타는 그날 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그게 벌써 2년 전 일이다. 그 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찾지 않았다.
"집에 안 가냐?"
카구야마가 쥰타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감상에 빠져있던 쥰타가 화들짝 놀라 쳐다보았다.
"너 오늘 하루종일 멍하게 있던데, 괜찮아?"
언제나 하루나 때문에 정신이 팔려 모르고 있었는데 카구야마는 쥰타를 꽤 챙겨주는 편이었다. 오늘도 멍하게 앉아 있는 쥰타를 볼 때마다 어깨를 툭 하고 건드리던지, 지금처럼 책상을 두들기든지 하며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쥰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꽤 빨리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다. 쥰타는 힘없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어디를 보나 괜찮아 보이지 않는 위태로운 미소에 카구야마가 인상을 찌푸린다. 쥰타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리며 말한다.
"괜찮지 않잖아."
퇴근이나 하라는 카구야마의 말에 아직 일이 남아서 안 된다고 둘러댔다. 사실 끝낼 일 같은 건 없었지만, 집에 가기가 싫었다. 그 집에 가서 또 혼자 잠이 들면 꿈에서 카즈키를 만날까 봐 겁이 났다.
집에 가기 싫은 이유가 있는 거라면 같이 남아서 술이라도 하자는 카구야마의 제안을 거절했다. 정말로 고마웠지만, 지금은 혼자이고 싶었다. 카구야마가 씁쓸히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드디어 회사에 혼자 남게 되었다. 벌써 9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깜깜해서 유리창엔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최근엔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오늘은 먹을 걸 입에 갖다 댄 기억이 없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고요함이 쥰타의 온몸을 감싼다. 사늘한 공기에 몸을 떨었다. 이토록 무게를 가진 고요한 시간을 견뎌 내는 것은 쥰타에게 있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더럽히고 마음이 약해진다. 이 회사에 들어오고 당분간은 잊고 살았던 감각이다.
그래, 특히 하루나를 알고부터는....
하루나를 알고부터는 언제나 그에게 휘둘리는데만 정신이 팔려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집에 와서도 피곤함에 뒤척이면서도 방심하고 있으면 여지없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이 하루나였다. 그는 쥰타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무리하게 끌고 다녔다. 그 휘둘림이 피곤하기는 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이런저런 고민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도 편했다.
보고 싶었다.
....누가 보고 싶은 걸까.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이 시간에 회사 전화가 울리다니, 받지 말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도 없는 커다란 공간에 울려 퍼지는 심야의 벨소리는 위압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쥰타가 전화를 받았다.
- 어! 진짜 있네? 뭐야 퇴근 안 했어?
다짜고짜 달려드는 하루나의 음성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 기막힌 타이밍. 역시 하루나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 알고.."
- 카구야마 선배가 전화했더라. 너 아직도 있을 거 같으니까 전화해서 집에 좀 돌려보내라고.
"......카구야마상이.."
- 뭐야, 목소리 들어보니까 정말 힘이 없잖아? 무슨 일 있었어? 아, 혹시 실망했어? 오늘 내가 없어서?
"........"
- 내가 보고 싶었구나?
쉴새 없이 물어오는 하루나의 질문에 한마디도 대답하진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도 모를뿐더러, 질문이 정리되지도 않았다. 무거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 사실에 카즈키를 향한 미안함으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째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 왜 대답이 없어? 설마 우는 거야? 너무 기뻐서?
"시끄러워..."
- 아, 그 말투. 쥰타다운 말투다.
"......."
딱히 할 말이 없으니 전화를 끊어버려도 될 텐데, 그럴 수가 없다.
인정하긴 싫지만, 조금은 보고 싶은가?
- 나 보고 싶지?
"........"
- 지금 갈까?
"뭐??"
- 세 시간 정도 걸릴 거야. 기다려
"잠깐!"
- 보고 싶잖아?
급하게 말하고 하루나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때서야 쥰타는 자신이 하루나의 핸드폰 번호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하루나도 자신의 번호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멍하게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지금 온다고? 지금 10시야. 세 시간? 도착하면 몇 신데? 멋대로 온다고 했을 뿐인데 굳이 내가 기다릴 필요가 있나?
하루나라면, 기다리지 않아도 상처받지 않겠지? 대신 다음 날 엄청난 보복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도끼눈이 되어 방방 뛸 하루나를 상상했더니 절로 웃음이 났다.
경비가 마지막 점검을 할 때쯤 쥰타는 밖으로 나왔다. 넓게 펼쳐진 도시가 적막함으로 가득했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서 시계를 보았다. 약 한 시간 뒤면 그가 도착할 것이다. 헉헉거리며 뛰어 올지도 모르겠다. 눈부신 미소를 걸치고 쥰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나 왔어."
하고,
"기다렸네. 잘했어, 잘했어."
라며.
머리를 쓰다듬거나, 혹은 볼을 꼬집거나, 어쩌면 안아 줄지도 모른다.
쥰타는 눈을 감고 꿈에서 들었던 카즈키의 음성을 떠올렸다.
'쥰타. 왜 그래? 힘드니?'
'아니예요. 선배. 난 괜찮아. 선배야말로 힘든 거 아냐?'
하루나를 향한 이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확실치 않지만, 아마 하루나라면.
'카즈상, 난 괜찮아요.'
괜찮을지도 모른다.
잠시, 그렇게 생각해 본다.
(4)
4.
시계가 곧 있으면 오후 1시를 가리킨다.
쥰타가 하던 일을 정리하고 점심으로 먹을 빵을 사려고 자리에서 살그머니 일어 설 때쯤, 가까운 곳에서 우당탕하고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크게 나더니 곧이어 굉장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한 남자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 남자의 등장과 함께 순간적으로 정적에 휩싸이는 공간이다. 숨을 헐떡이며 등장한 남자는 한 손으로 목에 매여진 넥타이가 갑갑하다는 듯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이마에 맺힌 땀을 대충 닦곤 환하게 웃으며, "다행이다. 아직 있었네" 하고 말을 거는 방향의 끝에는 쥰타가 있었다. 쥰타도, 책상 하나 건너의 카구야마도, 지켜보던 직원들도, 일제히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의 정적은 깨지고 그 공간은 다시 일상적인 소음으로 물들어 간다.
"하루나씨, 그냥 우리 부서로 이동하지그래?"
아직도 숨을 헐떡이는 하루나를 지나치며 한마디씩 건네는 그들이었다. 카구야마는 하루나의 등을 소리가 나게 퍽퍽 내리쳤다.
"아주 쇼를 해라."
그렇다. 그는 바로 옆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하루나 모토키. 고작 몇 미터 되지 않는 거리를 뛰어 온다 한들 이마에 땀이 맺힐 이유가 없다. 그의 훌륭한 연출력에 다들 감탄할 뿐이다.
그들의 반응에 하루나는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지만, 쥰타는 상당히 부끄러웠다. 꼭 저렇게 티를 내야 하는걸까.. 다른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타인의 시선이 누구보다도 신경 쓰이는 쥰타의 성격에 하루나의 화려한 어택은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이게 한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도망을 갈 정도로 행동이 빠르지 못한 쥰타로썬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쥰타가 꼼짝도 않고 서 있자 하루나가 다가왔다. 순간 뒤로 한발 물러날 뻔했으나 그 행동이 오히려 하루나의 사냥 욕구를 자극한다는 것을 눈치 챈 쥰타는 애써 침착한 척, 그러나 시선은 피하며, 애꿎은 책상 위의 볼펜만 만지작거렸다. 하루나가 씨익 웃는다. 쥰타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그에겐 통하지 않는다.
"밥 먹으러 가야지? 오늘도 빵? 어림없지. 오늘은 밥이다! 왜냐하면 오늘 점심은 카레거든!"
물어보지도 않은 점심메뉴를 읊더니 하루나가 쥰타의 어깨를 감싸고 무리하게 사내식당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쥰타는 밥보다는 빵이 더 편했으므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순순히 하루나의 페이스에 맞춰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그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봤자 쥰타만 피곤해질 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몸과 머리가 학습한 것이리라.
사내식당까지 내려가선 쥰타를 창가 자리에 앉혀 놓더니 하루나가 혼자서 식판 두개를 들고 가 카레를 받아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어..' 라고 작게 말했으나 하루나는 '내가 하고 싶을 뿐이야.'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무시한다.
요 며칠간 쥰타는 하루나를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하루나는 자신을 '좋아한다'라고 말했지만, 그 '좋아한다'라는 감정이 하루나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쥰타가 생각하는 의미와 같은 것일까. 쥰타는 하루나의 그 고백 이후 하루나를 볼 때면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에겐 전혀 그런 낌새조차 없다. 마음껏 쥰타를 휘두르며 끌고 다니고는 있지만, 그뿐이었다. 하루나는 쥰타에게 아무것도 원해오지 않는다.
일주일이면 되겠냐?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 쥰타는 일주일 안에 어떤 대답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하루나는 변함없었다. 고백의 대답을 요구해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한 관계로 발전한 것도 아니었다. 이 어정쩡한 관계가 쥰타에게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루나에게 이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요구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쥰타는 아직 하루나를 특별히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하루나가 멀어지는 건 싫었다. 여전히 겁쟁이면서도, 결단력 약한 자신을 나무랐다.
어째서 나는 전혀 성장하지 않는걸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루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그 말은, 장난이었을까? 알 수가 없다.
쥰타가 카레를 앞에 두고 숟가락으로 푹푹 휘저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하루나는 벌써 밥 한 그릇을 뚝딱 하곤 쥰타의 손에 쥐어진 숟가락을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하루나를 보자 그가 뺏어 든 숟가락으로 쥰타의 식판에 있던 밥을 퍼올린다.
"아, 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던 쥰타는 자신에게로 꽂히는 수많은 시선을 느낀 후에야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다.
"미쳤냐?!!"
하루나의 손에서 다시 자신의 숟가락을 빼앗아 와 밥을 허겁지겁 퍼먹었다. 그제야 하루나는 만족스럽다는 듯 턱을 괴고 쥰타를 감상 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꾸역꾸역 열심히 먹었다. 어차피 하루나에게 눈 좀 돌려달라고 부탁해도 무시당할 게 뻔하다는 걸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쥰타였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하루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참! 손 내봐!!' 하고 소리치더니 쥰타의 왼손을 끌어당겼다. 이번엔 또 뭐냐 싶어 지켜보니, 쥰타의 왼손에 하루나가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전화번호였다.
"내가 계속 가르쳐 준다, 가르쳐 준다 하다가 깜박했다. 내 번호. 나 보고 싶거든 여기로 연락해."
낯선 번호가 쥰타의 손바닥에 큼지막하게 써져 있었다. 쥰타는 한숨을 쉰다.
"명함으로 주면 되잖아?"
"그건 낭만적이지 않잖아?"
하루나는 실없는 농담을 치며 웃었다. 아니, 실없긴 해도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왼손으로 볼펜을 돌리는 하루나를 보면서 자신도 적어줘야 하나 싶어 고민하던 쥰타가 하루나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건 왜 그래?"
어디서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손바닥에 자잘한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 이거? 어제 좀... 술 먹고 넘어져서 다쳤어."
"술 못 마신다며?"
"못 마시는 놈이 마셨으니 넘어지지. 어젠 그럴 일이 있었어."
대충 얼버무리려는 것이 확연히 티가 나서 더 이상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술을 못 마신다는 하루나가 마셔야 했던 이유가 뭘까. 쥰타의 그런 의문을 캐치했는지 하루나가 말을 이었다.
"어젠 과거의 남자를 만났지."
"뭐?"
"결국 취하고 싶어진 나는 술에 손을 댔고, 한 잔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바닥을 굴렀다는 거야."
농담 섞인 가벼운 대답. 이런 식으로 선수쳐서 이 상황을 벗어나려는 거다.
"술 못 먹는 놈을 취하고 싶게 만든 걸 보면 상당히 잘난 놈인가 보네."
"난 지금도 취하고 싶은데..."
"또 실없는 소릴 하려고?"
"난 너만 생각하면 술이 땡겨."
"...잘난 옛남자랑 동급으로 취급당했으니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나?"
가시 돋친 쥰타의 질문에 하루나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거슬려서 쥰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려는 찰나 식당 안에 방송이 흘러나온다.
[하루나 모토키씨, 하루나 모토키씨. 이 방송을 듣고 계신다면 회사 정문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은 간단하게 같은 멘트를 두 번 반복하더니 사라졌다. 하루나와 쥰타가 눈을 마주친 후 동시에 스피커를 쳐다보았다.
"무슨 방송이 저래? 어느 부서인지는 밝혀야 하는 거 아냐?"
"...너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야? 빨리 나가 봐."
"저런 수상쩍은 멘트에 나 혼자 보낼려고?"
"......어"
"에이. 같이 가 줄 거지?"
거부해도 소용없다. 쥰타는 혀를 한번 차고 하루나보다도 먼저 걸음을 옮겼다.
회사 정문 가까이 가자 하루나를 발견한 한 사내가 큰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하루나의 멱살을 잡아채곤 큰 소리로 한마디 했다.
"돈 내놔!!!"
남자는 씩씩거리며 하루나를 놓아줄 기색 없이 쥐고 흔들었다. 하루나는 천천히 눈을 감더니 너였냐며 한마디 할 뿐이다. 쥰타가 그 사내와 하루나를 번갈아 보며 의아해하고 있을 때, 하루나가 사내의 손을 잡아떼더니 설명한다.
"중학교 때 후배야. 아베 타카야라고."
그 사내도 쥰타를 흘끗 보더니 가볍게 목만 끄덕여 보인다. 아베라고 불린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쥰타는 그가 낯선 인상이 아니라는 것에 잠시 놀랐다. 하지만 어디서 본 얼굴인진 기억나질 않는다.
자리를 옮겨 세 사람은 회사 근처 공원에 와 있었다. 각자 한 손엔 캔 커피를 들고 있었다. 하루나가 '한턱'이라며 억지로 쥐여준 것이다.
쥰타는 별 말 없이 그냥 커피만 홀짝일 뿐이었고, 아베는 뜨거운 음료였음에도 한 번에 목구멍 속으로 부어 넣고는 하루나를 노려보고 앉아 있었다. 하루나는 쥰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조금이나마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해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러니까.. 돈은 준다니까, 근데 지금 당장은 없어."
"말이 틀리잖아! 다음날 갚는다며!! 그런데 벌써 며칠째냐고!"
"아니 그러니까..."
"잔말 말고 내놔!! 살 거 있단 말이야!"
"뭐 살 건데?"
"알 거 없고!!"
티격태격대는 두 사람을 보다가 쥰타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얼만데? 내가 대신..."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하루나가 한 손을 들어 막았다. 아베의 불만이 가득 찬 시선이 그를 따른다. 괜히 쥰타만 찜찜해졌다.
"뭐 살 건지 말해 봐. 그럼 갚아 줄 수도 있지."
돈 빌린 사람 말 뽐새가 왜 저런가. 쥰타는 빚진 주제에 뻔뻔하게 그리 말하는 하루나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으면서도 후배를 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하루나가 어떤 부서인지도, 회사가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채, 기억을 더듬어 여기까지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런데 저리 대응하는 하루나를 보고 있자니 정말 자신의 돈이라도 내주고 싶어지는 쥰타다.
".......반지 살 거야."
후배인 그가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하루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반지? 누구한테? 야, 너 설마..."
"알 거 없잖아?"
원망 가득한 아베의 시선에 쥰타는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아니, 왜 이 자리에 자신이 끼어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하루나가 쯔쯧 혀를 차며 커피를 비우고 일어나 쓰레기통을 향해 던지는 순간 아베가 한마디 덧붙였다.
"어제도 돈 갚아준다고 해서 나간 거였는데, 혼자서 술 처먹고 취해서 주정이나 해대고..."
날아간 종이컵은 쓰레기통 귀퉁이를 맞고 떨어졌다. 노골이다. 하루나가 놀라고, 쥰타가 놀랐다. 하지만 아베만큼은 덤덤했다.
"노콘은 여전하군."
"상관없잖아?!!"
하루나가 버럭 하고 소리를 지르고 떨어진 종이컵을 주워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쓰레기통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쥰타는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분명하다. 이 아베 타카야라는 남자가, 어제 만난 과거의 남자. 그렇게 되는 건가?
"흐응.."
쥰타의 입에서 그도 모르게 새어 나온 소리에 하루나가 흠칫하며 어깨를 떨더니 쥰타를 쳐다본다.
"너 지금 무슨 오해 중이야?"
"오해?"
"그래, 분명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별로 그런 거... 아. 시간 됐다. 나 들어갈게."
쥰타가 대충 시계를 들여다 보는 척을 하고,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뒤에서 하루나가 '기다려!'하고 소리쳤고, 그 뒤를 이어 아베가 '돈 갚으라니까!' 하고 소리쳤지만, 쥰타는 돌아보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있던 쥰타는 식당에서 하루나가 적어준 손바닥 위의 번호를 내려다보았다.
씻으면 지워 질려나...
거슬렸다. 손바닥 위에 적혀있는 번호도, 하루나도, 그 남자도 거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그렇게 느끼는 자신이었다.
퇴근시간에 가까워 질 때까지 하루나는 그 후 한 번도 쥰타를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쥰타는 알고 있었다. 분명 퇴근 시간을 노릴 것이다.
예상대로 하루나는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쥰타는 무시하고 지나쳤지만 하루나는 쫄래쫄래 따라왔다.
"좀 기다려보라니까. 뭔가 오해를 하나 본데.."
하루나가 뒤에서 그렇게 말을 걸어왔지만 쥰타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빨라짐을 느낄 뿐이다.
"뭐야, 질투?"
순간 걷고 있던 쥰타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멈춘다. 하루나가 흠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쥰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쩔건데?"
예상 밖의 대답에 하루나가 드물게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이, 진짜야?" 하고 물으며 슬금슬금 쥰타의 곁으로 다가온다. 쥰타는 잠시 침묵하더니 하루나를 보며 대답했다.
".....역시 아닌 거 같아."
"아앙....?"
그리고 쥰타는 다시 걸었다. 여전히 빠른 걸음이다. 하루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마찬가지로 다시 그 뒤를 따른다. 전철을 타기 위해 표를 끊자 그도 따라 끊었다. 이동하는 전철 속에서 한마디도 건네지 않는 두 사람이었지만, 하루나는 포기하지 않고 뒤따라왔다.
"어디까지 따라 올 셈이야?"
"내 말 들어줄 때까지.."
"벌써 우리 집인데.."
"와~"
쥰타의 '우리집'이라는 단어를 듣고 하루나가 집을 한번 훑어 보곤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감동한 표정이라 순간 웃음이 나올뻔한 쥰타였다.
"난 그럼 이만.."
"어이, 잠깐!"
쥰타가 얼렁뚱땅 집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하루나가 잽싸게 손목을 낚아채 붙잡았다. 그리곤 손목을 타고 내려온 그의 손이 쥰타의 손바닥을 더듬는다. 하루나가 손바닥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남자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결국은 지워 버렸구만?"
쥰타가 손을 뿌리치고 바짓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런 쥰타를 보곤 하루나가 "아씨, 말하기 싫은데..." 라며 툴툴거린다.
"그 돈, 너 때문에 빌린 거야."
그렇게 말하는 하루나의 표정이 조금은 필사적으로 보였다.
"아니, 그날 있잖아 왜. 나 출장 갔던 날, 일단 도쿄에 도착하긴 했는데 도착해 보니 차가 다 끊겼잖아. 결국 택시를 타야겠는데 돈은 없고... 하필 카드는 전부 짐가방에 넣고 부쳐버려서 돈을 뺄 수도 없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SOS를 쳤지. 그 시간에 불러낼 만한 녀석이 그 녀석뿐이었거든. 어쨌든 녀석도 수중에 돈이 있었고, 내가 급하다고 하니까 달려와서 빌려주더라고. 그래서 빌린 건데... 어젠 진짜 돈 갚아주려고 부른 것뿐이었고, 그런데 녀석이 빨리 돈 갚으라고 사람을 볶으니까 괜히 화나잖아. 녀석 주제에 돈 쓸 데가 어디가 있냐고..."
"뭐? 그럼 일부러 안 갚았단 소리야?!"
하루나가 자신을 만나러 오기 위해 돈을 빌렸다는 사실보단, 역시 돈이 있으면서도 갚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신경쓰인다.
"갚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어쩌다 보니 술을 먹게 돼서 정신이 없어서 깜박 한 거라고."
"술은 대체 왜 먹었는데?"
하루나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꼭 말해야 하나."
그가 입을 삐죽인다. 드물게 보여주는 이 표정은 그가 곤란할 때 짓는 표정이다. 하루나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쥰타는 즐거워진다. 왠지 자신이 이겼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결국 하루나는 콧등을 한번 긁고 실토했다.
"... 네가 생각나서."
쥰타가 별 반응이 없자 하루나가 무안해 졌는지 더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어제 그 녀석 만나서, 이것저것 얘기하는데, 네 얼굴이 떠오르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너만 생각하면 술이 당긴다고."
하루나의 대답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쥰타를 보지 못했고, 쥰타는 그 대답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무안해 하는 하루나의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깜깜해진 골목 안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긴 침묵을 깨고 쥰타가 입을 연다.
"술이나 잘 먹고 그런 소릴하면..."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요."
쥰타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하루나를 본다. 그러다 가방에서 열쇠를 찾아 꺼내들었다.
"....들어 올래?"
"......뭐?"
"차 마시고 가."
쥰타가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손잡이를 돌리며 하루나에게 눈짓을 했다. 들어오라는 눈짓에도 하루나는 멍청히 서 있기만 할 뿐이다.
"싫음 말고."
그 한마디에 입을 멍하게 벌리고 눈만 깜박이던 하루나가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뛰어들어갔다. 하루나는 쥰타의 집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방 한가운데 팔짱을 끼고 서선 싱글싱글 거린다.
"자고 가도 돼?"
"절대 안 돼."
쥰타는 물을 끓이면서 생각했다. 방금까지의 그 거슬리던 감정은 뭐였을까? 질투와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 '과거의 남자'라는 말은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루나는 그 부분에 관해선 변명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하루나의 '과거'를 보았지만, 초조해지진 않았다. 그것이 '질투'와는 조금은 다르다고 느끼는 쥰타였다. 그 감정이 뭐였는진 자신으로썬 알 도리가 없다. 어쩌면 순간 불안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나는 '변명'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순간 그 감정은 사라졌다. 일주일의 기간은 장난이었을까? 라고 생각했던 의문도 사라졌다. 하루나는 진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찻잔에 물을 따르며 생각했다.
"오늘은 그만."
그래, 오늘은 더 이상은 생각하지 말자. 어쩌면 지금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하루나가 쥰타의 침대로 올라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어딜 누워!"
"나 피곤한데 진짜 자고 가면 안 돼?"
"안 돼!"
"잠만 잘게"
"안 돼!!!"
쥰타가 이불을 끌어내려 하지만 하루나는 몸을 둘둘 만 채 꼼짝도 않는다. 쥰타는 계속해서 이불을 뺏어보려고 힘으로 겨루다가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 침대 위에 하루나가 있다. 이 방안에, 타인이 있다. 한 번도 누군가를 초대해 본 적이 없었던 공간이,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하루나라는 타인이 들어옴으로써 같은 공간임에도 공기가 변한다. 그것이 조금은 신기한 쥰타였다.
"아, 근데, 그래서 결국 돈은 갚았어?"
"그게.. 너 때문에 또 깜박해서..."
"내 탓이란 거냐?!!"
아베 타카야. 하루나의 과거. 그에게도 과거가 있었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하루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단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 쥰타였다.
쥰타는 이불을 끌어당기던 팔에서 힘을 풀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포기한 상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나도 모르겠다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루나가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나 자고 가도 돼?" 라고 끈질기게 묻는다.
"아아, 마음대로 해."
갑자기 하루나가 허리를 끌어안는 바람에 쥰타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가 쥰타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 위에 올라 온 손등을 꼬집으며 "이건 뭐지?" 하고 묻자, "그냥 이러고 자자. 정말 잠만 잘게." 라며 꿍얼거린다. 쥰타는 더 이상 화를 낼 기력도 없어 누워 있었더니 이번엔 손이 올라와 쥰타의 가슴을 쓰다듬는다.
"말로 할 때 손 떼라."
나름 위엄있는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지만 손은 꼼짝도 않은 채, 하루나의 키킥 거리는 웃음소리만이 들려왔다.
"쥰타, 가슴이 뛴다."
"당연하잖아. 나도 사람이니까."
"아니, 점점 빨라진다고. 나랑 똑같네."
그렇게 말하고 손을 떼더니 허리만은 끌어 안은 채 등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왠지 안심된다."
하루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쥰타는 눈을 감았다.
쥰타는 그날,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이건 계속 돼 오던 수면부족 탓이라고, 절대 하루나 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쥰타였다.
(5)
5.
"잤다며?"
열을 올리며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쥰타의 옆으로 카구야마가 미끄러지듯 가까이 오더니 그 한마디를 꺼냈다. 쥰타는 영문을 몰라 "안 졸았는데요." 하고 대답한 뒤, 다시 눈앞에 놓여있는 서류 뭉치들과 씨름하기에 바빴다. 카구야마는 혀를 쯔쯧 차며, "하.루.나.랑 잤다며?" 라고 되묻는다.
순간 쥰타는 서류에서 손을 뗀 채 약 5초간 고민했다. 그리고 카구야마에게 묻는다.
"누가 그래요?"
"누구겠냐."
분명 하루나와 한 침대 위에서, 한이불을 덮고 잔 것은 사실이었지만 문자 그대로 잠'만' 잤을 뿐. 카구야마가 궁금해하고 재밌어할 일을 저지른 기억이 없기에 당황하지도 않았다. 다만 뒤에 덧붙여진 말이 신경쓰일 뿐이었다. 그걸 소문을 내고 다니냐. 역시 하루나답다. 여기서 만약 카구야마에게 '잠만 잤을 뿐이에요.'라고 대답해봤자 자신이 놀림을 당할 것이 뻔했기에, 쥰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 잤어요."
"쯧, 정말 놀리는 맛이 없는 녀석이네."
카구야마가 재미없다는 듯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를 흘리고, 다시 미끄러지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쥰타가 대충 일을 끝내고 커피를 마시려고 일어서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하루나가 잽싸게 쥰타의 어깨를 잡더니 안마라도 하는 듯 통통통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쥰타의 어깨를 풀어주고 나서 책상 위에 영화표 두 장과 팸플릿을 내려놓는다.
"뭐야 이거?"
"영화 보러 가자. 퇴근 시간에 맞춰놨어."
"....웬 공포영화?"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흘러내릴 듯한 필체로 휘갈겨져 있는 새빨간 제목이 어디를 보나 공포영화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쥰타의 찡그린 인상을 보곤 하루나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다. 그 미소를 보고 쥰타가 더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데이트의 공포영화는 남자의 로망!"
주먹을 불끈 쥐곤 하루나가 능글 맞게 웃었다. 쥰타가 영화표를 또 한 번 흘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예정 시간보다 영화관에 빨리 도착한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히 앉아 쉴 곳을 찾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틈에 있자니 영화도 보기 전에 먼저 지치는 쥰타였지만, 그런 쥰타를 최대한 배려해가며 장소를 물색하고 있는 하루나를 생각하면 그런 기색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는 쥰타였다.
쥰타는 늘 그랬다. 항상 저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버릇이 나오곤 했다. 속에 담긴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맞춰주고 만다. 다른 사람들처럼 애교 섞인 불평 한마디로 부담없이 자신의 기분을 전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쥰타는 그것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리고 그런 불편한 마음은 상대방에게 꼭 전달된다.
넌 너무 갑갑해.
언젠가 하루나가 쥰타를 향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곰곰이 떠올려 본다.
넌 숨 막히지 않아?
자신의 융통성 없는 성격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쥰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 성격에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하는 건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 그 성격은 쉽사리 바꿀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노력은 해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하루나는 참으로도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다.
눈치 보지 마. 너만 생각해.
말은 쉽지만, 그건 역시나 어렵다. 그 말을 끝내고 하루나가 몇 마디를 더 덧붙였던 기억이 있다. 그 말이 무엇이었더라.. 사람들 틈에 섞여 있자니 기억을 떠올리기가 쉽지가 않다.
"아, 저기 가자."
쥰타가 기억을 더듬어 보려 노력하고 있을 때, 하루나가 쥰타의 소매 끝을 잡아당긴다. 가리킨 곳은 커피숍이었다. 멍하게 서 있던 그가 걱정됐는지 하루나가 빤히 쳐다보았다. 쥰타가 애써 미소 지으며 '괜찮아' 라고 대답했다. 하루나는 그런 쥰타의 대답에 '내 앞에선 참지 말라고 했잖아' 라며 투덜댄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 하루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너한테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래? 뭔데?"
"..카즈상...이 누구야?"
하루나의 질문과 동시에 커피가 테이블에 놓이고, 그 순간 그들 사이에는 진한 커피 향이 진동을 한다.
"....누구한테 들었어?"
"너한테서"
"....어..?"
"잠꼬대로 그러더라고. 카즈상, 카즈상. ...어찌나 애달프게 부르던지 질투로 잠이 확 깼다."
카와이 카즈키. 그 이름은 여전히 그리운 향기로 쥰타의 가슴을 파고든다.
쥰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답했다.
"카즈상은, 고등학교 선배였고, 첫 남자였고,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커피잔으로 향하던 하루나의 손이 잠깐 멈추더니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동하는 커피 향 속에서 커피는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 두 사람이다.
"..그것뿐?"
"그것뿐."
"...나 오늘부터 커피 안 마셔."
하루나가 진지하게 선언한다. 그 모습과 말투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어이, 어이. 웃을 일이 아니라고 지금."
"..하핫.."
"야.."
하루나는 정말 끝까지 커피에 입 한 모금 대지 않았고, 적당히 시간을 보낸 후 그곳을 빠져나왔다.
영화 상영까지 약 10분. 하루나가 팝콘이라도 사올까? 하고 물었지만 쥰타는 부끄러우니까 참아달라고 답했다. 그 대답에, 역시 사와야겠다고 말하며 사라지더니, 얼마 안 있어 하루나가 양손에 팝콘과 콜라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도 콜라 하나에 빨대 두 개를 꽂고. 이 얼마나 부끄러운 장면인가. 쥰타는 그가 달려와도 애써 무시하며 딴청만 피웠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루나의 전화가 울린다. 엉겁결에 쥰타에게로 팝콘과 콜라가 전해지고 하루나가 전화를 받았다. 처음엔 '오~ 네가 웬일이냐?'라며 여유를 부리던 하루나의 인상이 점점 굳어져 갔다.
"타카야가? 어디가? 왜??"
타카야. 낯설지 않은 이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쥰타는 어째선지 가슴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왜 아픈진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래서? 넌 지금 병원이냐? 알았어. 갈게. 갈 테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가다니, 어딜?
쥰타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하루나를 보았지만 하루나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울면 어쩌자는 거야. 타카야 옆에 있어. 알았어. 기다려."
하루나가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끊고서야 생각났다는 듯 당황한 시선으로 쥰타를 향한다. 서로 시선이 교차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만 마주보고 서 있다가 하루나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쥰타... 미안한데 오늘은..."
"무슨 일 있어?"
"아, 응. 타카야가...아니, 어제 봤지? 아베가..."
"응"
"아베가 갑자기 병원에 실려갔다네? 지금 전화 한 애가 걔랑 같이 사는 앤데...도대체 울기만 하니까 무슨 일인지."
"...그럼 가 봐."
순간 안절부절 못하던 하루나의 행동이 멈췄다.
"얼른."
"...어, ...응."
하루나가 쥰타를 두고 등을 돌리려다 다시 한번 쥰타를 본다. 꼭 무언가 확인할 것이 있다는 듯한 시선으로 쥰타를 훑었다.
"왜?"
"아니, 저기, 오늘 영화는...."
"...영화는, 혼자서 봐도 돼."
쥰타의 대답에 하루나가 인상을 구겼지만, 결국 '알았어.' 라는 짧은 대답을 남기고 등을 돌려 뛰어갔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쥰타만이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그의 손엔 팝콘과 콜라가 초라하게 쥐어져 있다. 손에 쥐어진 그것을 쓰레기통에 고스란히 버렸다.'영화는 혼자서 봐도 돼.' 라고 대답했지만, 정말로 영화를 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다음에 같이 보자'라고 대답했어도 됐을 텐데 왜 자신은 그렇게 말해 버리고 만걸까.
쥰타의 그 대답에 하루나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눈치 챘다. 등을 돌리기 직전 마주쳤던 그의 눈동자엔 자신을 향한 실망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시선과 마주했을 때 쥰타는 꼭 거짓말하는 아이처럼 죄책감을 느끼며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하기 전에 먼저 등을 돌린 것은 하루나였다. 하루나는 '알았어'라고 대답했다. 간단하게 그렇게 말하고 뛰어가 버렸다. 손을 흔들지도 않았고, 내일 보자는 소리도 없었다. 그의 등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었지만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쥰타가 가슴에 손을 얹는다. 고동치는 심장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가볍게 두통을 느낀다. 개운치 못한 느낌이 쉽사리 사라지질 않는다.
"쥰타?"
집에 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확실하게 쥰타의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였다.
"쥰타 맞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역시나, 반가운 사람이 서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그를 확인하고 쥰타 역시 환하게 웃었다.
"싱고상..."
부드러운 미소의 주인공은 시마자키 싱고로 쥰타의 선배이자, 카즈키의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함께 야구를 했던 동료이며, 카즈키와 사귈 때도, 헤어질 때도, 쥰타를 격려해주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 관계로 미국으로 떠나있었다. 귀국했다는 소식은 접한 적이 없던 터라 우연히 들린 그 목소리에 놀랐다. 설마 하며 돌아봤더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시마자키 싱고였고, 여전히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배다운 타이밍이네요."
"왜? 또 뭔가 고민 중이었어?"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싱고와 회포를 풀고, 쥰타가 집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때는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자신의 발걸음 소리만이 크게 울리는 고요한 골목길을 혼자서 걷고 있자니, 또다시 하루나를 떠올리게 된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하는데 집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 우뚝 걸음이 멈춘다.
도둑?
긴장한 쥰타가 조심스럽게 접근하자, 그림자가 쥰타를 발견했는지 벌떡 일어선다. 그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방어자세를 취했으나 곧 시야에 들어온 얼굴을 확인하고 크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루나... 너..."
어째서 하루나가 이 늦은 시각에 쥰타의 집 앞에 앉아 있는 걸까. 아베 타카야라는 사람은 괜찮은 걸까. 현관까지 도착한 뒤 벽에 기대 서 있는 하루나를 흘겨보았다.
"이 밤중에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너 기다렸잖아.."
"......날? 왜?"
"......후우..내가 말이야. 쥰타 집은 아는데, 전화번호를 모르더라."
그러고 보니, 전화번호를 가르쳐준 적이 없음을 떠올리는 쥰타였다.
"할 말이 있는데 연락할 방법은 없고, 어쩔 수 없이 집까지 찾아는 왔는데 이 인간은 도착할 생각을 안 하고..."
"...하하."
"웃지 마."
하루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톤의 목소리였다.
"너는 궁금하지 않겠지만, 일단 들어."
하루나가 여전히 낮게 밑도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는 조금 침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 아베가 병원에 실려갔던 건, 단순한 맹장이었어. 그거 확인하고 난 바로 집으로 돌아왔어. 나한테 전화했던 녀석 머리통을 한 대 때려주고 나서. 영화관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넌 왠지 거기 없을 거 같아서... 영화, 안 봤지?"
쥰타는 대답없이 고개만 숙였다.
"난 네가 괜한 오해 할까 봐 계속 그것만 신경쓰였어. 뛰어가면서도, 집에 와서도, 계속 그것만 신경쓰여서 그거 변명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너 올 때까지 기다렸던 거야. 그런데 넌 아무리 기다려도 도착할 생각은 안 하지. 내가 얼마나... 그러고 보니 이틀 연속이네. 변명하려고 네 뒤만 쫓아다니는 거."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별 반응 없이 발끝만 보고 있던 쥰타의 머리를 툭 치며 말을 끊는다.
"뭐 됐어. 너는 이런 거 별로 안 궁금 할테니까..."
하루나는 숙인 쥰타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차가운 체온에 쥰타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리하게 쥰타와 눈을 마주쳐 왔다. 쥰타는 어째서인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변명도 했고, 온 것도 확인했으니까 가야겠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그가 지나치려고 하자, 쥰타는 저도 모르게 하루나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하루나는 순간 휘청거리더니 주춤하는 발걸음으로 균형을 잡는다. 의아해하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쥰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하루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크게 놀라는 눈동자가 하루나의 씁쓸한 미소와 함께 지워졌다.
"뭐야, 굳이 오늘 퇴짜 놓을 건 없잖아."
하루나가 등을 돌려 힘없이 소리내어 웃는다. 쥰타는 그런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살짝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간 움츠러드는 하루나를 느끼며 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루나는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쥰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차가웠다. 도대체 이 남자는 몇 시간을 이 서늘한 밤 공기에 노출되어 있었던 걸까.
"하지만 하루나가 다른 사람의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건 싫어."
"......뭐?"
"그러니까...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었으면 해."
".........잠깐."
하루나가 '잠깐, 쥰타 이 손 좀 놔 봐!'라고 말하며 열심히 쥰타를 향해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쥰타는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하루나를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쥰타는 누군가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괜찮아도, 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쥰타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은 어설펐다. 여유롭게, 피해를 줄여가며, 최대한 둥글게, 험한 길을 일부러 돌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언제나 쥰타를 힘들게 했고, 그의 주변 사람도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 성격이었다.
하지만 하루나와 있을 때는, 그것이 조금 변하는 듯했다. 그를 끌어안고 있자니, 낮에 떠오르지 않아 갑갑했던 기억이 솟아올랐다. 그 기억 속에서 하루나는, 저무는 해를 등지고 있었다. 눈부신 공간에서 따뜻하게 웃으며 쥰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만 생각 해.
날 이용해 봐.
날 연습상대로 생각하면 되잖아.
쥰타는 그와 함께 있을 땐 하루나의 안색을 살피는 일도, 하루나의 기분을 걱정하는 일도 적었다. 물론 아주 없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였다. 하루나와 함께 할 때면 조금은 제멋대로 행동해버리는 자신이었다. 하루나는 쥰타의 그런 제멋대로인 행동을 기뻐해 주었다. 진심이 아닌 마음에는 미소로 답해주지 않는다. 그런 하루나와 함께 하면서, 쥰타는 확실히 변했다.
쥰타는 궁금하지 않겠지만...
하루나의 말과는 달리 쥰타는 하루 종일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하루나는 그 사람 곁에 있는 걸까. 그 사람은 하루나에게 어떤 존재인 걸까. 하루나는 그 사람을 위해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다.그 순간 기분 나쁜 초조함이 전신에 퍼져 나갔다. 생각이 계속 될수록 초조하기만 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대로 두면 하루나는 멀어진다. 잡아두고 싶다. 하루나를 잃고 싶지 않다. 그 생각 끝에 나온 것은 기다려 달라는 치사한 대답이었다. 지금까지의 쥰타로써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애매한 결론. 하지만 하루나가 상대라면, 고집을 부리게 된다. 도망가지 않고 부딪혀 볼 용기가 생긴다.
"좋아, 기다려주지 까짓 거. 일주일이면 되겠냐?!"
쥰타의 손을 푸는 건 포기한 채 하루나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 말에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오버랩되어 쥰타는 그만 웃어버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쥰타의 침대 위에 누웠다. 쥰타가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말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어쩔수 없잖아. 차가 끊긴걸."
(잠시 침묵)
"....계산 아냐?"
"우와! 너무한다!! 나 잘 거야!"
"하루나.."
"왜!"
"...아베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잠시 침묵)
"아베는 내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줬던 사람."
"흐음..."
"그런데 난 정작 그 녀석이 힘들 때 버리고 도망가버렸어."
"최악이군."
"그래서 그런지... 그 녀석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외면할 수가 없어."
(잠시 침묵)
"쥰타는?"
"응?"
"쥰타의 '카즈상'은?"
"...선배 이름은 카와이 카즈키라고 하는데, 나를 안아 줄 때면 언제나 커피 향이 나는 사람이었어"
"나 내일부터 진짜로 커피 끊는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선, 하루나의 '아베 타카야' 같은 존재"
"......쥰타"
"응?"
"안고 자도 돼?"
"안 돼"
"쳇"
그 후 두 사람 사이엔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 어느새 방 안엔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다음날, 열심히 컴퓨터를 만지는 쥰타의 앞에 카구야마가 얼굴을 들이밀며 "또 잤다며?" 하고 말을 걸어왔고, 하루나는 '홍차 티백'을 들고 쥰타를 찾아왔다.
"오늘부터 쥰타도 홍차로 바꾼다."
"싫어."
"왜!! 그렇게 커피가 좋아?!!"
"...어."
"너무 해!!"
하루나의 호들갑에 쥰타가 환하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보던 카구야마가 놀란 시선으로 하루나를 보았다. 카구야마와 눈이 마주치자 하루나는 미소를 지으며 작게 말했다.
"내 솜씨야"
마치 한 손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을 것만 같은 미소였다.
(6)
6.
"......뭐 하는 거야?"
쥰타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린 것은 복도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박스와 그것을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하루나였다. 쥰타의 목소리에 하루나가 뒤 돌아보더니 눈웃음 지으며 "왔어?" 하고 인사를 한다.
"이거 옮기는 거 도와줄래?"
쥰타는 왜 짐짝이 복도에서 굴러다니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지만 일단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겉옷을 벗었다.
"뭐야 이거?"
"내 짐"
"이게 왜 여기 나와 있어?"
"이동하거든."
순간, 박스를 들어 올리려던 쥰타의 동작이 멈춘다. 설마 정말로 우리 부서로 오려는 건가? 라는 생각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런 쥰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하루나는 역시나 다 알고 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한다.
"우리 부서 이동하거든요. 한참 위층으로, 내가 아무리 네 스토커여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말끝마다 '-요'를 붙여 장난을 치는 하루나를 쥰타가 잠시 노려본다. '평소에 댁 행동이 그런 오해를 사게 만드네요' 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아침이기도 했고, 예상 밖의 육체노동을 하느라 답하기도 귀찮은 쥰타였다.
"그런데 이런 건 보통 쉬는 날 하지 않아?"
"응, 남들은 그러지."
"넌?"
"난 쉬는 날 회사 오는 게 제일 싫거든? 내건 알아서 옮길 테니 놔두라고 했더니 정말 고대로 놔뒀더라고."
쥰타는 하루나도 하루나지만, 하루나네 부서 사람들도 만만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오래 잡혀 있는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쥰타가 물끄러미 멈춰있는 숫자를 응시하고 있자 하루나가 말했다.
"엘리베이터, 보고 있으니까 이상하다."
"뭐가?"
".......내가 엘리베이터만 보면 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말이야. 그게 뭐냐하면 말이야.."
"됐어"
"응?"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쳇"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하루나가 10층 버튼을 누른다. 꽤 높이 올라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는 문이 닫히면 밀실이야."
"그래서?"
"그렇다고."
쥰타는 슬쩍 하루나를 쳐다본다. 눈앞만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그는 시원한 눈매와 매끄러운 콧날을 가졌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자랑한다. 누군들 쉽게 잊을 수 없는 얼굴이고, 한 번쯤 뒤돌아 보게 하는 존재감이다.
그런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다. 쥰타에게 주어진 기한은 일주일. 이번에야말로 어떤 결론이든 답을 내야만 한다. 아니, 어쩌면 그 답은 이미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자신의 발목을 잡아 끄는 주저거림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단을 내려 줄 확신이 들지 않는다. 일주일 뒤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바뀌는 걸까. 하루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처음부터 쥰타를 몰아세웠다. 그 주저없음이 부러운 쥰타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넋을 잃고 보고 있는데, 하루나의 입술 끝이 올라간다. 반사적으로 긴장하고 마는 쥰타였다.
"왜 자꾸 그렇게 쳐다봐?"
"누가 쳐다봤다고?!"
"...심심하면 나랑 뽀뽀나."
그때, 경쾌한 기계음이 들리더니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앞엔 같은 야구부 소속이며, 하루나네 부서, 미즈시마 부장이 서 있었다. 서둘러 인사를 하는 쥰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답해준다. 그리곤 어정쩡하게 서 있는 하루나를 향해 한마디 했다.
"사내 성희롱 금지"
"...부장님, 어딜 봐서 성희롱이라는 겁니까? 그냥 짐 옮기는 거라고요."
"자네 얼굴이 성희롱이라고 말하고 있어."
아아,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점심때가 되었음에도 하루나가 나타나질 않자 쥰타네 부서 사람들은 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왠지 자리를 떠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혀 다들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시간이 되면 하루나가 뛰어온다. 그것을 신호로 자리에서 일어서 식당으로 향하는 평소 패턴에 이상이 생기자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이다. 쥰타는 쿡하고 웃으며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5분 후. 하루나가 나타났다.
"뭐야, 하루나씨 무슨 일 있어??"
"아니, 난 시간이 잘못 된 줄 알았잖아."
"이젠 하루나씨 없으면 불안해서 식사도 못하겠어.."
긴장 돼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느슨해지며 다들 농담을 한마디씩 건네곤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사람들의 반응에 얼떨떨하게 서 있는 하루나를 보며 쿡쿡거리고 있는데 쥰타의 바짓 주머니에서 문자 착신음이 새어나온다. 평소에도 하루나가 아니면 그다지 문자를 주고받는 사람도 없기에 쥰타가 의아해 하며 폰을 꺼내 들었더니, 그곳엔 싱고의 이름이 찍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관에서 헤어질 때 싱고와 번호를 교환했던 게 생각나는 쥰타였다. 설마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쥰타가 문자를 확인해 보려는 순간, 쥰타보다도 빠르게 하루나의 손이 먼저 그것을 낚아챈다.
"본다."
"...벌써 보고 있잖아."
하여간, 냄새를 잘 맡는 남자다.
"뭐야 이건. 오늘 만날 수 있어? 라는데? "
" 네, 라고 답해줘"
"...누군데?"
"고등학교 때 선배"
하루나가 '선배'라는 말에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선배야"
"안 물어봤어.."
그리곤 정말로 답 메일을 대신 보내주더니 쥰타에게 핸드폰을 돌려준다.
그날, 퇴근을 하고 쥰타는 회사 앞에 서서 싱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하루나 역시 집에 돌아가지 않은 채 그런 쥰타와 같이 서성이고 있다. 집에 먼저 가라고 했음에도 '다른 남자와의 밀회는 용서치 못한다. 바람도 내가 보는 앞에서 피워'라는 얼토당토않은 고집으로 버티고 있었다. 하루나와 시선만으로 으르렁대고 있는 사이 어느새 싱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얼레..?"
도착한 싱고가 쥰타의 옆에 경호원처럼 달라붙어 있는 하루나의 존재를 눈치 채고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누구...?"
"아 저기, 친구..라고 할까. 오늘, 같이 갈 수 있느냐고 묻기에..."
"뭐?"
싱고로썬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쥰타가 괜히 미안해 져서 고개를 숙인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지 않았나 떠올려 보는 쥰타였다. 어째서, 하루나의 행동에 자신이 미안해지는 걸까.
"미안한데,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할 말도 있으니 될 수 있음 둘이서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싱고의 대답에 난처한 시선으로 쥰타가 하루나를 올려다봤다. 하루나가 대답한다.
"안돼"
"...죄송해요. 싱고상.."
하루나를 달래는 것 보단, 싱고를 설득하는 게 더 빠르다고 판단한 쥰타가 그만 사과를 하고 말았다. 싱고가 난처하다는 듯 웃는다.
세 사람은 어색한 공기를 감추지 못하고 카페 한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싱고가 일단은 자기소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명함을 꺼내며 하루나에게 인사를 한다.
"늦었지만, 난 쥰타의 학교 선배로 시마자키 싱고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루나 모토키입니다."
정중한 싱고의 인사에 하루나는 한마디로 답할 뿐이었다. 그런 하루나의 행동에 화가 나는 쥰타였지만 싱고의 앞이라 화도 못 내고 그저 불편하게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나타난다. 하루나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랑 이 사람은 홍차."
"어? 쥰타, 너 커피 안 마셔?"
"당신은 커피?"
"아니, 난 커피 별로 안 좋아해서..."
하루나의 질문에 싱고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상큼한 미소를 띠고 종업원에게 말한다.
"전 밀크티 주세요."
어색한 공기가 좀처럼 누그러들지 않는다. 처음부터 싱고는 쥰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불러낸 거였다. 그런데 그곳에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런 예의 없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쥰타는 싱고에게 속으로 미안하다고 수십 번을 사과할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그냥 다음에 만나자고 미룰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 싱고조차 하루나의 페이스에 저도 모르게 말려들고 만 것이리라. 여기까지 왔으니 적어도 주문한 차는 다 마시고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갑갑한 공기를 느끼며 쥰타가 작게 한숨을 쉰다.
"하고 싶은 말이란 게 뭡니까?"
침묵을 깨고 그렇게 물은 사람은 쥰타도 아니고 하루나였다. 싱고가 불편한 표정을 하며 하루나를 본다. 아까부터 계속 시비를 거는 듯한 건방진 하루나의 행동이 영 못마땅한 싱고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걸 왜 네가 묻는 거야..."
쥰타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하루나는 그런 쥰타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미안한데, 남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은 아니라서..."
"뭔데요? 사랑 고백?"
"하루나!!"
참다못해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하루나는 역시나 반응하지 않았다. 쥰타는 싱고에게 대신 사과를 했다. 싱고는 한 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괜찮다고 답한다. 그런 두 사람은 아랑곳 않은 채 하루나는 그저 싱고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루나는 건방진 성격의 남자였지만 무례하진 않다. 그저 쥰타의 아는 사람, 혹은 학교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을 이유도 그에겐 없다. 그런데 그는 싱고를 상대로 화를 내고 있었다. 숨김없이 드러나는 적의가 싱고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런 하루나를 달갑게 느끼지 않았다. 싱고는 이유도 모른 채 하루나의 적의에 대항하고 있다.
쥰타는 그런 하루나를 보며 또 한 번 생각했다. 무서울 정도로 감이 좋다.
될 수 있으면 이 두 사람만 남겨두고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쥰타의 핸드폰이 울린다. 회사였다. 아마도 오늘 잔업을 하고 있는 카구야마나 다른 동료에게서일 것이다. 받지 않을 순 없다. 쥰타가 가볍게 두통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응"
"...쓸데없이 문제 일으키지 마."
쥰타의 그 한마디에 하루나가 그제서야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었다.
"응"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는 쥰타였다.
"하루나씨... 라고 했나? 당신 ...뭐야?"
"친구라고 했을 텐데요. 쥰타가."
쥰타가 자리를 뜨자마자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공간이다. 시선이 부딪힐 때마다 파직하고 불꽃이 튄다.
"그러는 당신은, 쥰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적어도 사랑 고백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싱고가 그렇게 답하곤 앞에 놓인 밀크티를 향해 손을 뻗는다. 하루나가 그런 싱고를 잠자코 바라만 보다가 불쑥 답한다.
"쥰타를 좋아합니다."
"뭐?"
"쥰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구요."
"......."
"쥰타의 뭐냐고 물었죠? 난 아직 쥰타의 아무것도 아니예요. 단지 쥰타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네가 쥰타에 대해서 뭘 안다고..."
쥰타를 왜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쥰타의 무엇을 좋아하냐고 묻는 싱고의 질문에 하루나가 미묘한 미소를 흘린다.
"...당신이 나에게 말해 주고 싶어하는 것 중 하나는 알고 있어요."
"......"
"... 적어도 '하나'는 얘기 해줬으니까"
싱고가 하루나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밀크티를 또 한 번 홀짝이고 하루나를 자세히 뜯어본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쥰타를 좋아한다. 그가 자신을 경계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쥰타와 하루나. 그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싱고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 때문에 날 경계한 거라면 이제 그만 둬. 난 정말로 사랑 고백이나 하려고 쥰타를 불러낸 게 아니니까"
싱고의 대답에도 하루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우지 않는다.
"정말이라니까..."
"당신은, 쥰타의 뭘 알고 있지?"
"적어도 너보단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3년을 함께 했으니까..."
"... 3년동안 당신은 쥰타의 뭘 봐 왔어?"
"뭐라니?"
"쥰타한테 무릎을 걷어차이거나 시끄럽다는 소리 한번이라도 들어 본 적은 있어?"
"....갑자기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갑자기 대화의 방향이 바뀌자 싱고는 난처하게 되물었다. 이 남자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좀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없지?"
"... 뭐, 일단 선배니까."
하루나는 그 대답에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싱고는 그가 왜 갑자기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듯 웃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신, 쥰타랑 같이 잔 적은.., 끄악!!!!"
하루나가 갑자기 뒤통수를 잡고 쓰러진다. 그의 뒤쪽으로 쥰타가 싱글싱글 웃으며 서 있었다.
"무슨 얘기 해요?"
"어..아니, 얘기라기보단..."
"쥰타 너!!! 아악!!!"
쥰타가 자리에 앉는 순간 부활한 하루나가 또다시 쓰러진다. 어째선지 이번엔 허벅지를 세차게 문지르고 있다. 하루나가 그렇게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쥰타는 그런 하루나는 아랑곳 않는다. 쥰타는 어째선지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싱고는 그 미소가 어딘가 무섭다고 느낀다. 쥰타를 보자 "왜요?" 하고 묻는다. 싱고는 시선을 피하며, "아, 아무것도 아냐"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쥰타가 변했다.
싱고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카페를 빠져나왔을 때, 이미 하루나는 방금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모습은 착각이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방긋방긋 웃으며, "그럼 안녕히 가세요! 싱고상!!"라고 인사하는 하루나를 얼떨떨하게 보며 싱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말았다.
싱고와 헤어지고 쥰타가 하루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오늘 대체 왜 그랬어?"
"뭘?"
"내가 아는 사람이잖아. 내 선배라고. 그런데 뭐야? 그 무례한 행동은"
"아아, 미안. 내가 오해했나 보더라."
"오해?"
거리는 꽤 어둑해져 사람들로 인해 붐비기 시작했다. 하루나가 바삐 걸어가는 인파에 치이고 있는 쥰타의 손을 잡아끈다.
"어이.."
"괜찮아, 붐벼서 다들 안보일 거야."
그렇게 말하더니 쥰타의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그제야 꽤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자신의 손이 차갑게 얼어 있었다는 걸 하루나의 온기로 깨닫는 쥰타였다. 괜히 쑥스러운 쥰타가 목소리 톤을 떨어트리고 다시 물었다.
"무슨 오해냐니까..."
"...아니 그게, 그게 말이지.."
"뭐냐고..."
"...난 정말로 너한테 고백하러 온 건 줄 알았거든."
하루나가 자신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더니 콧등을 긁적이곤 말을 이었다.
"내 감으론 말이야. 그 사람 분명히 너한테 흑심이 있단 말이야. 처음 딱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그러니까 그...뭐랄까. 분위기에서 말이야. 왜 그런 말 있잖아.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전혀 상관없잖아 그거."
"아무튼! 그거랑 비슷한 느낌으로.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기 마련이거든. 그러니까... 분명히 나랑 마찬가지로..."
"하루나..."
"아니, 근데 확실히 아니라고 대답하는 표정을 보니까, 정말 아닌 거 같긴 했는데.."
"...싱고 선배한테 고백받은 건 이미 오래전 일이야"
하루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오고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길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것만큼 불편한 일은 없다. 쥰타가 자신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이들을 짜증스럽다는 듯이 보고 하루나를 잡아끌었다. 일단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공원이 보이기에 그곳까지 하루나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했다. 아무래도 쥰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마지막 한마디가 꽤 충격적이었나 보다.
"정신 차려."
하루나를 공원 벤치에 앉히며 뺨을 툭툭 건드렸더니 그제서야 하루나가 눈을 깜박이며 되묻는다.
"뭐?"
참, 빨리도 반응한다. 쥰타가 하루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싱고상한테 고백 받은 건 이미 옛날 일..."
".....역시 그 녀석!!!!!"
"아니, 지금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니까. 고등학생 때 일이었으니까."
"뭐?!!!"
"...음, 카즈키 선배랑 사귀기 전이었으니까... 정말 옛날이네..하핫."
"쥰타..."
"...응?"
"...너 고등학교 때 아주 날렸구나."
하루나의 원망 섞인 시선을 보며 쥰타가 웃는다.
"내가 왕년에 한 가닥 했지."
고등학생 때, 싱고한테서 고백을 받았다. 그 고백을 들었을 때, 쥰타는 가장 먼저 '무섭다'라고 느꼈다. 싱고에게 무리하게 팔목을 붙잡혀 끌려간 부실에서 고백을 들었다. 자신의 팔목을 감싼 싱고의 손에서 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그 손안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자신의 힘으론 싱고에게서 달아 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부실. 꽉 잡힌 팔목. 초조해 하는 싱고의 시선을 느끼며 쥰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싱고가 그에게 무언가를 강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쥰타는 그저 단순히 무섭다는 감각으로 떨고 있었다. 그런 쥰타의 반응에 싱고의 눈동자가 담고 있던 강렬한 빛이 약해져 갔다. 상처받은 것이다.
그 후, 싱고와 쥰타는 꽤 오랫동안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한 발자국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싱고와, 역시나 움직일 기색이 없는 쥰타의 관계는 좁혀들지 않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다가 흐지부지 무너져 버렸다. 싱고는 쥰타가 불편해 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색한 관계가 싫었던 것이다. 그것은 쥰타 역시 마찬가지로 될 수 있으면 예전과 같이 편한 관계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싶어 노력했다.
물론, 이미 생겨버린 벽은 완벽하게 허물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 사건을 계기로 싱고와 쥰타가 예전과는 다른 거리감으로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쥰타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카즈키와의 관계에 있어, 자신감을 잃어 갈 때면 늘 그를 다독여 주었던 사람이 싱고였다. 그를 거절했으면서, 그와 가장 친한 친구와 사귄다는 사실이 처음엔 불편했던 쥰타였으나, 싱고는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카즈키였던 거구나.
실망한 듯 그렇게 한마디를 하곤, 쥰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축하해" 라고 말하고 웃었다. 그 미소에 거짓은 없었다.
"또 없어?!"
"뭐가?"
"내가 모르는 너의 <과거의 남자 리스트>"
"....음, 없을걸"
"어째서 확신이 아닌 거야?!!"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고 공원을 방방 날뛰는 하루나를 무심히 쳐다보며 쥰타가 말했다.
"추워. 커피 좀 뽑아와"
하루나가 그런 쥰타를 잠시 흘겨보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하곤, 고개를 푹 숙이고 자판기를 향해 걸어갔다. 쥰타는 축 처진 어깨가 조금은 귀엽다고 느낀다.
하루나가 커피를 뽑으러 간 사이 쥰타의 핸드폰이 또 소리를 내며 울린다. 확인해보니 싱고에게서 온 문자였다. 하루나가 없는 틈에 빨리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열어보던 쥰타의 행동이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굳어 버린다. 그렇게 한참을 굳어 있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하루나를 확인하고 핸드폰을 재빨리 바짓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쥰타는 하루나가 뽑아 온 캔 커피를 받아들곤, "아, 따뜻해~"라며 기분 좋다는 듯 두 손으로 꼭 쥐고 웃는다. 그런 쥰타를 내려다보고 있던 하루나가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곤란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곤 불쑥 말했다.
"손잡고 싶어."
"...응?"
"..안아도 돼?"
"...뭐?"
"..키스하고 싶어."
갑자기 줄줄 튀어나오는 하루나의 요구에 잠시 침묵하던 쥰타가 답했다.
"해도 돼."
"......정말?!!"
"단, 지금 키스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못한다고 생각하고 해."
"......지금 하는 건 싫어?"
"어."
"그럼 안되지. 난 쥰타가 싫어하는 일은 평생 안 해."
"정말?"
"응!"
"정말 평생 안 해도 돼?"
"그건 안되지"
"......뭘 어쩌라는 거야..."
하루나가 등을 돌려 캔 커피를 홀짝인다. 그렇게 홀짝이다가, 지금 마시고 있는 것이 '커피'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캔 커피를 들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뒤돌아보는데, 쥰타가 손에 쥔 커피를 하루나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캔을 흔들면서 대답한다.
"난 안 마셨어."
쥰타가 심술궂게 웃었고, 하루나는 심통이 났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려버렸지만, 곧 그의 손에 감겨오는 쥰타의 체온을 느끼면서 결국은 헤실 헤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 손으론 손을 꼭 잡고, 한 사람은 커피를 홀짝이고, 한 사람은 커피를 뺨에 대고 차가워진 체온을 녹인다. 이렇게 하루나와 나란히 앉아 있는 시간이 편하다.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이 순간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초조해 지지 않는다. 어색해 지지 않는다. 하루나라는 인간과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하다.
쥰타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떠올렸다. 두 눈을 꼭 감는다. 저도 모르게 하루나와 맞잡은 손에도 힘이 꽉 들어갔다. 그것을 느꼈는지 동시에 하루나가 쥰타를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벤치에 기대있는 쥰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커피를 홀짝일 뿐이었다.
"쥰타, 커피 안 마실거야?"
"응..."
"그럼 왜 사오라고 한 거야?"
"추워서"
이번엔 하루나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쥰타가 이상하다는 듯 하루나를 보자, 하루나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커피 따뜻해?"
"그래"
"...내 마음의 온도야"
하루나가 눈으로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방금까지 따뜻하게 올라가던 체온이 급격히 추락하는 걸 느꼈어."
쥰타 답지 않은 농담 섞인 대답에 하루나도 쥰타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루나는 조금 웃다가, 별 거 아닌 것에 웃음을 그칠줄 모르는 쥰타를 본다.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인데, 언제나 우울한 그림자를 동반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하루나였다.
쥰타가 그런 하루나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결국은 웃음을 멈추고 묻는다.
"뭘 봐?"
"이뻐서"
이젠 당황스럽지도 않다.
"아, 그래. 그래."
하루나의 말을 건성으로 받고, 밤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완전하게 자리 잡은 별을 보며,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쥰타가 말한다.
"그러고 보니, 배고프다."
"응..."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이다.
(7) END
7.
쥰타는 오늘도 컴퓨터를 잡고 씨름을 하고 있다. 그는 아무래도 기계와는 친해질 수가 없었던 건지, 시대에 뒤떨어질 정도로 기계치에 컴맹이었다. 쥰타가 컴퓨터와 친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컴퓨터에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게임을 즐기지도 않았고, 웹서핑도 하지않는다. 쉬는 시간엔 음악을 듣다가 잠을 자거나, TV를 보다가 잠을 자거나, 독서를 하다가 잠을 잔다. 쥰타는 사실 잠이 많은 체질이었다.
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잠귀가 밝은 편이었다. 자다가 조금이라도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금세 잠에서 깼고, 한번 잠에서 깨면 다시 잠이 들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린다. 게다가 예민한 성격 탓에 조금이라도 고민거리가 있으면 금세 불면증으로 이어졌다. 가끔 잠을 못 이루는 날이 계속 되기라도 하면 그는 지하철이나 버스 속에서 선 채로 잠이 들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익숙지 않은 손길로 한참을 씨름하다가 한숨 돌릴 생각에 기지개를 켠다. 온몸이 찌뿌둥한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잠시 쉬고 있는데 하루나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검색하다가 짧은 한 줄의 문자가 눈에 들어오고 만다.
[ 카즈키가 보고 싶어 해 ]
싱고가 보낸 그 문자는 간단하게 끝났지만 한참을 시선이 머물다가 떨어진다. '보고 싶어 해' 애매한 문장이다. 자신을 만나자는 것도 아니다. 선뜻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시선을 옮겨 천천히 하루나에게서 온 문자를 검색해 본다. 그것 역시 짧고 간단하게 새겨져 있었다.
[4일 남았어]
짧게 웃음이 터졌다.
카즈키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쥰타도 카즈키가 보고 싶었다. 싫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다. 정이 떨어지거나, 사랑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제대로 헤어지자는 말 조차 나누지 못하고 이별했다. 그냥 평소처럼 '안녕'하고 헤어졌지. 고작 그것뿐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한 사람과 헤어지는데 쥰타가 한 말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눠봐야 하는 걸까. 카즈키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아니면 미안해하고 있는지, 카즈키가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라면 꼭 만나서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당신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날, 제대로 헤어지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미련이나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서로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헤어졌어야 했다. 그렇게 도망치듯이 헤어지면 안 되는 거였다. 쥰타는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약해빠졌던 자신을 후회했다.
지금까지는 카즈키의 소식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이미 고등학교 때 연락하고 지내던 사람과의 연락도 뜸했으며 결정적으로 두 사람을 연결 하고 있던 싱고가 외국에 나가있었기 때문이다. 싱고 역시 쥰타가 직접 묻지 않는 한은 카즈키 얘기는 될 수 있는 한 피해주었다. 헌데 설마 이제 와서 카즈키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게 될거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카즈키는 싱고에게 어떤 식으로 얘길 한 걸까. 단순히 보고 싶다고, 그냥 그 한마디였을까. '보고싶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 ..........카즈키를 보고 싶다고는 느끼지만,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지만, 이젠 그의 손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싱고와 만나는 것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금세 마음이 움직였겠지. 그와 만나게 해달라고 매달렸겠지.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스치며 눈물이 났겠지. 하지만 지금의 쥰타가 그 문자를 확인했을 때 취한 행동은 하루나의 시선을 피해 잽싸게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숨겼던 것. 문자가 생각나는 순간 하루나의 손을 꼭 쥐고 있었던 것. 그것 뿐이었다.
"어이, 쥰타. 쥰타..?"
"으음...?"
깜박 잠이 들었던 건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떠 보니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쥰타와 하루나만이 남아 있었다. 아, 벌써 점심시간인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니 하루나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왜 그래? 어제 못잤어?"
"..아아.. 좀.."
하루나가 왠지 피곤해 보이는 쥰타의 얼굴을 보다가 살그머니 그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준다. 응? 이 행동은 무슨 의미인가 싶어 올려다보았더니 그가 싱긋 웃으며 이번엔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쥰타가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손을 떼곤 대답했다.
"더 자. 내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뭐 좀 사오지 뭐."
"아냐 괜찮아..."
"사람 없을 때 자 둬. 남들 보는 앞에서 조는 것보단 낫잖아."
"......"
"이런 걸로 감동하지 마."
"안했어!"
하루나가 나가고 쥰타가 천천히 눈을 감는다. 방금 그가 쓰다듬어주었던 감촉이 되살아 나는듯했다. 기분 좋은 손놀림. 편안해지는 목소리. 어느새 다시 잠에 빠져드는 걸 어렴풋이 느끼며 쥰타가 조그맣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퇴근하고 회사를 빠져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싱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이 없자 찾아온 것일 테다.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단지 하루나가 허둥댔을 뿐이다.
"당신이 여긴 웬 일이야? 볼일 끝난 거 아니었어?!!"
"넌 여전하구나."
"싱고상... 잠깐 저랑 얘기좀 해요."
"아, 응. 나도 그러려고 온거니까.."
"에? 에에..?"
싱고와 쥰타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하루나를 두고 인적이 드문 공간을 찾아 발길을 옮기려는데 역시나 하루나도 뒤를 따라온다. 쥰타가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루나를 보며 눈에 힘을 주고 "기다려!" 라고 얘기했지만 당연하게도 "싫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숨을 쉬곤 하루나에게 다가가 작게 말했다.
"따라오면 정말로 평생 못 할줄 알아"
"으윽..."
그 한마디에 전의를 상실한 포즈로 팔을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푹 숙인다. 하여간, 다루기 쉬운 남자다.
"문자는 봤어?"
"봤죠."
두 사람이 도착한 장소는 회사 건물 모퉁이를 둘러싸고 있는 조그만 휴식공간이었다. 싱고에게 음료수를 하나 뽑아 주고 쥰타는 그저 바짓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싱고와 마주 보고 선다.
"어쩔거야?"
"어쩌고 뭐고... 카즈상이 무슨 얘길 했는데요.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해요?"
"카즈키는 아무 말도 하진 않았어. 그냥, 그 녀석 얘기 들어 주는 중간 중간, 자꾸 네 이름이 튀어나와서.."
".....내 이름.."
싱고는 쥰타가 건네 준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티는 안내도 그 녀석 너 많이 보고 싶어해. 술이라도 마시면 항상 네 이름이 튀어나온다고. 얼마 전에 우연히 너 봤다는 소리 하니까 그 녀석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하긴 놀랄 만도 하겠지. 그동안 같은 도쿄 하늘 아래서 살고 있었음에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다며. 지금까진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까 현실감이 없었겠지. 거리감도 느낄 수 없었을거야. 같은 도쿄 아래. 충분히 찾아낼 수 있는 거리. 만날 수 있는 공간. 지금까진 그게 와 닿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내가 널 만났어. 자신의 가슴에 묻은 사람을, 내가 만난 거야. 그때 새삼스럽게 깨달았겠지. ......그때 카즈키가 내 얘기를 듣고 힘없이 웃으며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카와이 카즈키는 한 손으로 입 주변을 쓸고, 이마를 몇번 만지작 거리고, 뺨을 부비고, 그렇게 어수선한 동작을 몇번 반복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구나, 왜 몰랐지? 쥰타는 나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었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어째서 지금까지, 나는 꼭, 추억이나 꿈 속이 아니면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말하는 카즈키의 모습이 너무나도 쉽게 연상이 되는 쥰타였다.
"카즈키는, 별로 너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해달라던가, 너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던가,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그렇겠죠."
카즈키라면, 쥰타가 자신을 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쥰타의 삶에 자신이 끼어들어 흔들어 놓을 순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카즈키는 쥰타의 발밑이 약하디 약한 지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넌, 아직 안되겠니..?"
"......"
"...아직 녀석을 만날 수 없어..?"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상한 대화를 나누고 있네."
갑자기 들려오는 하루나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하루나가 벽에 기댄 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아,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그 얘기를 다 듣고 있었을 줄이야...쥰타가 이마에 손을 대고 눈을 감는다.
"카즈킨지 뭔지, 난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한가지는 알겠어. 저 두 사람 일에 당신이 간섭할 이유가 없다는 거"
"... 그럴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난 친구로써..."
"친구로써 뭘 어쩌자는 건데. 도대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루나가 화가 난 듯 싱고를 향해 걸어온다.
"이제 와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겠다는 이유는 뭐야? 그건 두 사람 일이야. 당신이 두 사람의 등을 억지로 떠밀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당신 치사해. 카즈키라는 사람 탓인 척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냥 까놓고 말해서 내가 쥰타 옆에 어슬렁거리는게 꼴보기 싫은 거 아냐?"
싱고는 하루나의 발언에 당황하며 입을 닫았다. 쥰타는 머리 한구석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와 싱고의 사이를 가로 막고 섰다.
"하루나, 그만해."
"좋아했던 사람이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아닌 다른 녀석과 붙어 다니는 게 그냥 싫은 거 아냐?"
"그만 하라니까!"
"친구니 뭐니 그런거 필요 없어. 두 사람 일이야. 당사자들이 해결할 일이라고! 당신이 끼어드는 것 자체가 반칙이라고!"
"하루나!"
언성이 높아지는 하루나의 어깨를 거세게 잡고 말렸다. 그제야 하루나도 쥰타를 마주본다.하루나가 작게 어깨를 들썩여 숨을 뱉더니 낮고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쥰타는....이제 그 사람 필요 없어. 내가 있으니까. 그 사람 필요 없다고."
어린애가 투정하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다. 우두커니 서 있던 싱고가 이미 비어 버린 음료수 통을 쓰레기통에 집어 넣는다. 그리곤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 쥰타. 그 사람 말도 틀린 건 아냐.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어. "
"싱고상..."
"단지 난 정말로 카즈키가 마음에 걸렸을 뿐이야. 쥰타가 괜찮다면, 한번쯤은 두 사람이 만나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두 사람, 속에 쌓아둔 게 많잖아. 정말로 아무런 사심은 없었어. 하지만, 내 행동이 거슬렸다면 당신한테도 사과는 해 두지."
싱고가 두 사람을 지나치며 쥰타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넸다. 카즈키의 이름이 있었다.
"카즈키와 만나고 싶다면, 그쪽에 적힌 번호로 연락하면 연결 될 거야."
쥰타는 명함에 적힌 핸드폰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번호는 바뀌지 않은 채였다. 전화를 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쉽게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싱고는 쥰타에게 명함을 건넨 후, 하루나의 어깨를 툭툭 친다. 꼭 잔뜩 성이 나 있는 하루나를 달래는 듯한 동작이었다.
"당신도 너무 안달하지 말고, 자신감을 좀 가지는 게 어때?"
그 말을 듣고 하루나가 움찔 거렸다.
하루나에게 자신감을 가지라니, 이 자신만만한 남자가 타인에게 그런 충고를 받게 될 줄이야. 그 말에 하루나보다 쥰타가 더 어안이 벙벙해 져 있는데 싱고는 그런 쥰타를 보고 짧게 웃음을 흘리더니 작게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연락 할 거야..?"
"...글쎄."
"글쎄라니?! 하겠단 거야??"
"글쎄라고 했잖아. 그리고 네가 아까 말하지 않았어? 남이 간섭할 자격 없다고."
딱 부러지게 그렇게 말하는 쥰타를 보고 하루나가 힘없이 시선을 피했다.
"아아, 그래..."
그리곤 터벅터벅 등을 돌려 걷는다. 쥰타는 하루나가 회사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손에 들린 명함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카와이 카즈키]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우리는 함께 살고 있었다. 꿈이 아니면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가슴에 묻어 버렸지. 다시 만나는 건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는데. 쥰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눌렀다.
"내일 카즈상 만나러 갈 거야."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하루나를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했다. 하루나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뭐?"
"..내일, 카즈상 만나러."
"왜? 왜? 왜???"
"..왜라니.."
"... 그 사람이랑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
"할 말이 남았다기보단, 해줄 말이 있어."
"안가면 안돼?"
"안돼"
하루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카즈상이랑 뭘 어쩌겠다는게 아니라.."
"싫어"
"...응?"
"가지 마"
싫다고 말하는 하루나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순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낮고, 조그만 목소리로 '가지 마'라고 말한다. 이제 와서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하루나는 쥰타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가지 마"
"...하루나. 그러니까 별로 난 카즈상이랑 다시 시작하고 싶다거나, 그런 의미는..."
"굳이 가겠다는거야?"
"...가고 싶어."
카즈키를 만나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쥰타는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루나가 결심을 굳힌듯한 쥰타의 대답에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내일이면, 토요일이네. 아, 내일 우리 쉬는 날이던가.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을 물어보기에 순간 따라오려나 싶어 긴장한 쥰타였지만, 장소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무리 하루나라도 따라올 순 없다.
"3시.."
"음. 3시."
"...하루나?"
"...그럼 난 3시에 영화관 앞에서 기다릴게"
하루나의 대답에 순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쥰타는 한박자 늦게 묻는다.
"뭐?"
"전에 우리 영화 못 봤잖아. 거기로 와. 재밌는 거 골라놓을테니까. 영화관 앞에 왜 동상 있잖아? 아 근데 거긴 사람이 좀 많았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아! 그 근처에 공원 있었다 참. 거기로 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아서 기다릴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무슨 소릴..."
"난지 그 사람인지 선택하라는 소리야."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카즈상을 특별한 의미로 만나보려는게 아니라...!"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난 쥰타가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거 싫어. 난 용서 못해. 싫어!"
무모한 요구가 어이가 없다. 쥰타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탓한다.
"....왜 그렇게 유치하게 굴어?"
그 한마디에 하루나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듯 고개를 들어 살피더니, 곧 다시 쥰타를 향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 원래 유치해. 넌 내가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를 질투하고 있는 거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 내가 얼마나 꼴불견인지. 얼마나 속이 좁은지 전혀 모르지? 난 그런 남자야. 그러니까 안 돼. 무슨 이유던 간에, 그 남자는 안 돼. 난 그냥 네가 그 남자를 만난다는 그 행동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결정해. 내일 3시, 난지 그 남잔지 선택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 뿐이야."
쥰타는 밤새 잠을 뒤척이다가 몇 시간 제대로 자지도 못한 채 토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비가 오려는지 축축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진다. 창밖을 보았더니 아침임에도 어두운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아무래도 큰 비가 오려나 보다. 우산을 챙겨서 나가야 하는 걸까...어디에 뒀더라, 찾아야 하는데...그렇게 생각하는데도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지금, 우산 걱정을 할 때인가?
쥰타는 어째서 하루나가 이토록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새로운 목표를 포착해서 달려들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어울려주면 금세 질려서 떨어져 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쥰타의 예상과는 달리 항상 싱글싱글 웃으며 쥰타의 주위를 맴돌았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넌 언젠간 내 것이 될거야' 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다. 쥰타는 이 남자가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있던지, 아니면 진심이 아니던지, 둘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나는 언제나 진지했고, 쥰타를 만만하게 보지도 않았다. 항상 장난치듯 웃고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깨닫기까진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언제나 진심을 보였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기다리는 것에 약하고 성격도 급했다. 자존심 강한 어린애처럼 소유욕이 강하고 질투도 많은 하루나다. 화를 내던 하루나가 스쳐간다. 무섭게 노려보던 그의 눈동자가 사실은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져 밖으로 나왔더니 하늘은 한껏 비를 뿌릴 기세였다.
'비까지 오면 정말로 곤란한데......'
우산을 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뚝뚝 빗방울이 떨어졌다. 결국은 비가 내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가 거세진다. 아무래도 이 비는 멈출 생각이 없나 보다. 빨리 가야겠단 생각에 택시를 잡아탔는데 생각이 짧았다. 지하철을 이용했어야 하는데... 꽉 막힌 도로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겨우 도착했나 싶더니 어느새 약속 시간으로부터 5분이 지나있었다. 허둥대며 뛰다 보니 바짓단이 지저분해진다. 하지만 그런거, 아무렴 어떠냐. 지금 적어도 5분 이상 바보같이 비를 맞고 있을 남자를 생각하면 그저 마음만 급해진다. 될 수 있는한 빨리 뛰어야 된다.
젠장, 오늘 일을 두고두고 얘기하겠지. 아아, 생각만 해도 귀찮아. 내가 왜 택시를 탔을까!
속으로 투덜거리며 공원으로 향했더니 아무도 없는 공원에 우두커니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앉아있는 하루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 저럴 줄 알았어. 저 치사한 자식.
쥰타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가 잽싸게 우산으로 비를 막아 주었다. 하루나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어 올린다. 이미 뛰어오는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마치 지금 눈치 챘다는 듯, 굉장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너 말이야.. 진짜 치사해.."
"....응. 나 치사해"
"너 일부러 비 맞고 있었지??"
"응. 비가 오길래 럭키라고 생각했지."
"......아아..정말! 너라는 인간은!!!"
하루나라면 일부러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쥰타의 성격을 잘 아는 만큼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남자다. 그리고 카즈키 역시 쥰타의 성격을 잘 아는 만큼 비가 내리면 절대 그 비를 맞으면서까지 쥰타를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 그것이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안 추워?"
"카즈키라는 사람..만나고 왔어?"
"그럴 시간이 어딨냐?!"
"오늘 비 안왔으면 만났을 거야?"
어디를 향하는가는 비가 오는 순간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사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도 쥰타는 하루나를 향했을 것이다. 하루나의 버릇없는 행동에 화가 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자존심 센 남자가,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에게 매달려 왔다. 쥰타는 그것을 뿌리칠 정도로 모질지 못하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하루나였다. 카즈키를 향할 수가 없었다.
"안 추워?"
대답을 피하고 또 한 번 물었다. 안 추울리가 없다.
"추워. 추우면 어쩔 건데"
"어디 따뜻한데 가자."
"...그 사람, 안 만나도 돼?"
"이제와서 무슨... 어차피 보내주지도 않을거면서..."
카즈키를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오늘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다. 카즈키라면 아마 지금쯤 쥰타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신하고 이미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어제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던 카즈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들어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반가운듯 환한 목소리로 "쥰타"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될 수 있으면, 얼굴을 보고 대화하고 싶었는데...카즈상,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어쨌든 춥지? 어디 좀 가자."
"뽀뽀해주면 안 추울것 같은데.."
"너 진짜..."
이 상황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싶어 황당한 표정을 지으니, 농담이라고 대답하며 벌떡 일어선다.비를 맞아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올려 넘기는 하루나 였다.입술이 파랗다. 추우면서 허세는 잊지 않는 남자다.
"할까?"
"어?"
"해도 돼. 할래?"
하루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쥰타를 보며 눈을 껌벅거리다가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아니, 안할래."
"...왜?"
"너 지금 다른 남자 생각하고 있잖아? 난 그런 쥰타하곤 키스하고 싶지 않아."
그리곤 쥰타가 들고 있던 우산을 뺏어 들더니 하루나를 가려주느라 어느새 흠뻑 젖은 쥰타의 어깨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들면 네가 젖잖아"
"난 이미 다 젖어 있으니까 상관없어."
"감기 걸려"
"이제 와서 가린다고 걸릴 감기가 안 걸리겠냐."
"바보같긴..."
우산을 나란히 쓰고 걸으며 어딜 가서 비를 피할까, 아니면 집으로 가서 몸을 녹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하루나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하자"
"응?"
"쥰타의 머릿속이 나로 꽉 차 있을 때 그때 하자. 키스."
그렇게 말하는 하루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새빨개진 얼굴이었다. 추워서 입술이 파래졌던 사람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귀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쥰타가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자 하루나가 될 수 있는 한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가리려고 한다. 그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웃겨서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자리에서 키킥 거리자 하루나가 화를 낸다. 화를 내며 더더욱 빨개진 얼굴로 웃지 말라고 다그친다.
"웃지 말래도 무리야. 너 지금 얼굴, 얼굴이..."
"말하지 마!! 알고 있으니까 말하지 마!!"
"크크큭 아, 배 아파..아아.."
"너 진짜!! 사람이 용기를 내서 말했는데!"
"무슨 말? 다시 한번 말해 봐. 너 진짜 유치하다. 크큭"
"이게 바로 남자의 순정이란 거다!!"
"순정은 무슨.... 하하핫...."
어린애 처럼 떼를 쓰고, 화를 내고, 유치하고, 치사하고, 계산적이며, 성격이 급하고, 자기중심적인 눈앞의 남자. 쥰타는 눈앞의 이 남자를, 어느새 사랑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너 이제.. 나랑 사귀는 거 맞지?"
"3일 남지 않았어?"
"그렇지만 오늘, 나왔잖아..."
"그거야 네가 어린애처럼 버티고 서 있을 걸 아니까 나온 거고. 3일간 더 고민해 볼게."
"너무하는 거 아냐?!"
"너무하는 건 너야. 그 3일은 카즈상을 바람 맞힌 대가라고 생각해!"
옆에서 자꾸 너무한다고 울먹거리는 하루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걸었다. 아무래도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이대로 있다가 하루나가 감기라도 걸리면 그 틈을 타서 병간호를 부탁할 인간이었기에 어떻게든 감기에 걸리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칭얼대는 하루나를 질질 끌며 따뜻한 장소를 찾아 걸었다. 걷고 있는 쥰타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볍고,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쳐져 있는 것을 쥰타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런 쥰타의 표정을 보고 하루나 역시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끝까지 눈치 채지못하는 쥰타였다.
하루나와 헤어지고 쥰타는 집에 도착해 카즈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몰래 전화를 한다는 것이 조금은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오늘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신호음이 울리고 얼마 안 있어 카즈키가 전화를 받는다. 쥰타라는것을 확인하곤 목소리 톤이 밝아진다.
쥰타는 오늘 카즈키에게 꼭 할 말이 있었다. 그리고 카즈키가 만약 쥰타에게 할 말이 있는 거라면 그것도 피하지 않고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즈키는 쥰타에게 특별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만나지 못해서 아쉬웠다고, 다음엔 꼭 얼굴 한번 보자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그런 기본적인 안부인사들 뿐이었다.
"저 오늘, 카즈상 만나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 그래? 뭔데?
"....카즈상"
- 응?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이번엔 건너편에서 짧은 침묵이 이어지더니 카즈키가 대답했다.
- ......그래?
"....아마 누군지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 어?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안다기보단... 뭐, 모르는 사람은 아니죠.."
- 그래? 궁금하네. 누군데?
"...다음에.. 같이 만나요. 그때 소개해 줄게요"
- .....쥰타
"네?"
- 행복하니?
행복, 행복이란 게 뭘까요. 카즈상. 일상은 변하지 않고, 저는 아직도 카즈상이 그립고, 일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고, 아직도 야구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울렁거려요.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네, 행복해요."
...아마도 행복한가 봐요.
처음엔 짧게 끝내려던 통화가 길어졌다. 밤늦게까지 한참을 얘기했다. 쥰타는 그날 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나가 엮이면 언제나 이런 패턴이다.
그러고보니 결국 오늘도 영화 못봤잖아... 다음엔, 내가 먼저 보자고 해볼까...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또 하루나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곤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부끄럽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부끄러운 만큼 자꾸 웃음이 나는 쥰타였다